역사서 해설과 묵상 (50)
“그 시대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 판관기는 분쟁과 시련의 시기를 보여준다. 판관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성읍을 건설한 가나안 사람들의 위협 속에 살았고 또 주변민족들 곧 요르단 동쪽의 암몬과 모압 사람들의 준동, 미디안 사람들의 약탈, 야포 남쪽 해안지역에 새로이 정착한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런 위험 앞에서 각 가문과 지파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이럴 때 한 ‘구원자’가 일어나 자신이 속한 가문과 지파 사람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 위험상황에서 해방시켰다. 덕분에 그는 일정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그의 임무와 활동영역은 제거해야 하는 당면한 위험상황에 한정되었다. 가끔 여러 지파가 힘을 뭉치는 경우도 있었다(판관 4-5장; 7,23). 이런 연합전선은 국가적인 자의식을 일깨웠다. 에프라임 지파는 초대되지 않았기 때문에(판관 8,1-3; 12,1-6) 비난 받았다. 드보라는 소집령에 응하지 않은 네 지파(르우벤, 길앗, 단, 아세르 지파)를 강력히 비반했다(5,15-17). 그러나 드보라가 남쪽의 두 지파 곧 ‘유다 지파’와 ‘시메온 지파’를 언급할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훗날 두 왕국으로 분열될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 구원자의 권위가 확고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타는 일시적인 두목 이상을 원했다(11,6.8). 기드온은 여러 도시의 우두머리처럼 행세했다. 기드온은 왕권을 거부했지만,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처럼 행세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해졌다. 판관기는 왕정 이전에 이스라엘 안에서 판을 치던 혼란을 말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끝을 맺는다. 하나는 판관기 17-18장 ‘단 지파의 이동’과 ‘단 성소의 기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판관기 19-21장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과 ‘벤야민 지파를 거슬러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단 지파는 원래 배정 받은 남쪽 지역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게 되자 북쪽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북쪽 에프라임 사람 미카의 개인 성소에서 신상을 훔쳐 라이스에 있는 새 성소에 그 신상을 옮겨 놓았다. 라이스는 그 뒤 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벤야민 전쟁은 기브아 사람들이 저지른 못된 짓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야기는 살아남은 벤야민 남자들이 실로에서 처녀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 것으로 끝난다. 벤야민 지파의 전쟁은 본문 뒤의 정황을 보면 사실은 남북전쟁이었다. 남쪽에 정착한 벤야민 지파와 북쪽 지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판관시대에 존재했던 남북간의 갈등과 분열을 잘 보여준다. 판관시대의 이런 분열은 결국 솔로몬 사후 남북분단으로 연결되었다. 판관기 17-21장 부록은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하지만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 중이나 유배 후에 판관기 안에 첨가되었다. 이렇게 첨가되었다고 보는 근거는 제관계 문헌에서 발견되는 어휘가 많기 때문이다. 부록에는 “그 시대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는 후렴이 여러 번 등장한다(판관 17,6; 18,1; 19,1; 21,25). 이것은 임금이 없이 일시적인 판관들에 의해 유지되던 부족동맹 체제의 위험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무질서는 임금을 세움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관기의 부록은 다만 부족적인 관습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의 비극적인 결과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첨가되었다. 이런 상황은 뒤이은 왕정의 시작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묵상주제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이야기하렵니다. 지극히 높은 분이시여,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시편 9,2-3) [2013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