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지금도 개들이 목동과 함께 양을 지키고 있다. 유목민에게 개는 목자의 심부름꾼이자 양 떼의 호위병이었다. 원조는 늑대였다는 사실이 정설이다. 언제부터 가축화되었는지 의견이 다양하다. 후각이 발달하여 사람보다 10만 배 이상 뛰어나다고 한다. 현재 사육되고 있는 개들은 200여 종이 넘는다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개는 부정적 의미로 등장한다. 어리석은 행위를 거듭하는 자를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대인은 돼지와 동급으로 취급했다(마태 7,6). 부정한 동물의 대표가 돼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견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을 개에 비유하면 엄청난 모욕이 된다. 그런데도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다. 지독한 오만이다. 하지만 개는 충직한 동물이다. 주인의 목숨을 살린 충견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서 채집된다. 개만큼 이중적 의미로 판단되는 동물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개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툭 하면 다투고 싸운다. 조금 이상한 낌새만 느껴도 짖기 시작한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개의치 않고 복종한다. 이런 점이 원인이었다. 아무렇게나 교배하고 섞여 사는 것도 커다란 이유였다.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대인에게 좋은 짐승으로 비춰질 수 없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들개로 전락한 개들이 많았다. 이들은 동물의 사체를 먹었고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개를 보면 피했고 개라는 용어의 사용을 수치로 여기기 시작했다. 사무엘기 하권에는 다윗이 요나탄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와 같은 저를 보살펴 주십니까’(2사무 9,8) 극도로 자신을 낮춘 말임을 알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 마태오복음의 기록이다(마태 7,6). 페니키아 여인은 딸을 고쳐 주십사고 청했다가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라는 말씀을 듣는다.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역시 부정적이었다. 지난해(2012년) 미국은 7,580만 마리의 애완견이 있다고 보도했다. 인구 4명당 한 마리꼴로 키운다는 얘기다. 부정은커녕 신성한 동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2013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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