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 여행 (8) 마르코가 선포하는 예수님 :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마르코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느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시 사건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통치자들의 관점에서 극악무도한 반역자에게 행해지던 십자가 형벌은 인류의 반역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메시아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이해했다. 이처럼 십자가상의 죽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 사건인 동시에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이 완성되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겪으셨다. 하지만 그분의 십자가 옆을 지나가던 이들은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15,29ㄴ-30) 하고 말하면서 모독하였다. 조롱하는 몸짓은 시편 22,7에 나오는 원수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또한 시편 22,9와 지혜 2,17-20에는 악인들이 의인에게 주님께서 구원해주실 것 같으냐고 다그치는 말이 나오는데, “너 자신이나 구해보아라.” 하는 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마르코는 예수님의 모든 수난이 구약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며, 그분 스스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행인들이 한 것과 비슷한 말로 예수님을 조롱한다(마르 15,31-32). 이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들을 구원한 것처럼 자신을 구원하고(15,31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15,32ㄱ) 요구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은 구원하면서도 당신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분은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셨으므로 죽기 전에는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실 것이다.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15,37). 예수님은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두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부활의 승리, 종말론적 심판, 사명 완수에 대한 확인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죽는 순간에도 메시아로서의 힘과 권능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15,38). 이 장면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늘이 갈라졌던 장면(1,10)과 병행되어 있다.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십자가상의 죽음 때 성전 휘장이 갈라졌고, 세례 때 하느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셨듯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고 고백한다. 두 사건 사이에 다른 점은, 세례 때 하느님의 증언이 예수님만 들을 수 있는 비공개적인 것이었다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마르코가 선포한 복음(1,1)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본 것은 로마의 백인대장뿐이었다. 장차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될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이다. 마르코는 백인대장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라고 촉구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고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2013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전주가톨릭신학원 성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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