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여행]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일곱 개의 가톨릭 (공동) 서간 중에서 맨 앞에 배치된 성서입니다. 이 책은 서신의 일반적인 서두, 즉 발신자와 수신자 정보를 시작으로 시작되지만 그 이후에는 일반적인 신약 서신의 특징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전체 구조 역시 뚜렷한 구조 없이 발신자, 수신자 정보(1,1)를 제공한 직후 여덟 가지 주제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편지의 형식으로 쓰여졌다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설교문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1.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1,2-18) 2. 신앙의 실천(1,19-27) 3. 재물의 활용(2,1-13) 4. 믿음과 실천(2,14-26) 5. 혀의 중요성과 지혜(3,1-12) 6. 논쟁에 대한 격언(4,1-12) 7. 재물의 위험성(4,13-5,6) 8. 종말론적 훈계와 병과 죄에 관련된 가르침(5,5-20) 야고보서는 자주 ‘바오로 신학’과 대척점에 있는 편지로 오해받아 온 책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율법에 따른 의로움’과 ‘믿음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주제로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행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었다고 역설한 데 비해, 야고보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오랫동안 정경(canon)으로 인정받는데 어려움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서간이 언급되는 것은 3세기의 교부 오리게네스에 의해서입니다. 또 가장 오래된 사본 역시 3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파피루스 20번과 23번(P20, P23)입니다. 오리게네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이 편지 역시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대등한 책으로 여기게 됩니다. 반면에 팔레스티나에서는 4세기 초엽의 교회 역사가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에 의해서 처음 언급되는데, 그는 이 책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영감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합니다(「교회사」, III,25,3 참조). 시리아 교회에서는 그 정경성이 인정되지 않다가 시리아의 에프라임(306-373)에 이르러서야 시리아어 성경에 포함시키고, 서방에서는 4세기 초반까지 언급되지 않다가 중후반에 가서야 히에로니무스나 아구스티누스 등에 의해서 인정받으면서 서방 교회에서 정경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히게 됩니다. 이 서간의 정경성이 다시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입니다. 개신교의 분리로 인한 서방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기 전까지 이 서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었던 그는, 개혁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입장을 바꿔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의심하며 정경에서 제외하길 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보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이 책의 내용이 루터의 신학과 맞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판단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충분치 않고, 그분의 고통과 부활, 성령을 보내심과 같은 신약의 주요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가 복음적인 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나 요한의 첫째 편지, 바오로 서간 - 특히 로마서, 갈라티아서, 에페소서 - 베드로의 첫째 편지 등과 비교할 때, ‘지푸라기 서신’(stroern Epistel; 1522년판 신약성경 서문)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에 반발하여 트렌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해 야고보서 뿐 아니라 성경의 현행 정경목록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게 됩니다. 루터교 역시 17세기 이후로는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야고보서의 정경 논쟁은 또 다른 관점에서 ‘신앙과 실천’의 문제를 바라보도록 하기도 합니다. 특히 사회문제로 시끄러운 이때에 교회 내의 다양한 소리들의 불협화음은 과연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103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정의와 화해와 평화를 위한 투신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사랑에 근거하고 거기에서 완성됩니다. (중략)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웃 사랑은 개인으로서나 지역 또는 보편 교회 공동체로서나 우리에게 항구한 투신을 요구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충만함, 그리고 성경 전체의 충만함은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했다거나 적어도 성경이 어느 부분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 그 지식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이 이중의 사랑을 건설하기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교 교양 De Doctrina Christiana」, I. 35,39-36,40, PL 34,34)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는 늘 ‘복음의 가치’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정당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복음의 가치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종북주의로 오도하는 소위 교회를 걱정하는 ‘뜻 있는 천주교 평신도 모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의 어르신들께 제발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먼저 걱정하시고, 성경 좀 읽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3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가톨릭교리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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