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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말씀 그루터기: 집으로 돌아가는 야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2 조회수3,417 추천수1

[말씀 그루터기] 집으로 돌아가는 야곱

 

 

돌아가기 싫은 곳이 있습니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에 돌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기서 동전을 던집니다. 다시 돌아오고 싶은 모양이지요. 저는 그 트레비 분수를 천 번도 더 지나갔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려면 늘 그 분수 곁을 지나갔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동전은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야말로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외국에 갈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만기된 여권은 갱신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예 문서 파쇄기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긴 기간은 아니고 총회 기간 한 달 동안입니다. 한참 전부터, 이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떠날 때가 되면 1주일 전에 병이 날 것 같았습니다. 가기가 싫어서요. 이제 떠날 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아직까지 병이 안 났습니다. 

 

왜 이렇게 돌아가기가 싫을까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가면 만나야 할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정말 무슨 병이라도 탁 걸려서 못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야곱 생각이 납니다. 2년쯤 전에 에사우에 대해 썼던 적이 있지요. 오늘은 야곱입니다. 언젠가 피정 중에, 창세기 32장을 읽고 묵상해야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야곱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창세 32,23.25). 식솔들은 모두 앞서 보냈으나 자신은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남아 있었던 야곱의 캄캄한 밤… 그 밤에 생각이 닿자 저는 결국 묵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나는 안 갈 거야! 안 갈 거야!’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 건,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붙잡고 씨름을 하면 결국 가야 하기 때문이었겠지요. 야곱은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붙잡고 밤새 씨름을 했습니다. 안 돌아가려고 작정을 하면 씨름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저는 그 밤에 묵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안 갈 거야!’ 말고도 그 밤에 제가 외친 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내가 옳았단 말이야!’였습니다. 내가 옳았는데, 내가 옳았었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내가 틀린 사람처럼 여겨졌던 것이 분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돌아가면 그 사람들은 ‘그것 보라고, 네가 틀렸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 이제는 내가 틀린 것을 인정하고 돌아왔다고 생각하겠지.’ 야곱은 돌아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야곱의 과거를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20년 전에 왜 그들 곁을 떠났는지를 압니다.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였고, 형의 권리를 빼앗았고, 그래서 도망갔다는 것을 압니다. 아니, 고향에는 바로 그 형, 에사우도 살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잊었을지 몰라도 에사우는 내가 한 일을 기억하겠지! 그런 사람들을 대면해야 하는 야곱. 내가 잊고 싶은 과거를 그들도 잊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안 갈 거야!’ 더 이상 마음에 품고 고민을 하지도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32,27) 하고 버텼습니다. 저는 그런 야곱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마 2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2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아직도 물가에 서 있습니다. 이제 다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몇 달째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하느님을 붙잡고 씨름할 순간은 뒤로, 뒤로 미루고 있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이기든지 지든지, 씨름을 하기는 해야 합니다. 건너가야 하니까요. 제가 가야 할 총회 세 달 전부터 매일 회의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고, 이제는 점점 더 좁은 땅으로 밀리고 있음을 느낍니다. 

 

발이 땅에 뿌리를 박은 듯 물가에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합니다. 왜 돌아가기가 싫은가? 사람들을, 상황을 대면하기가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다시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때의 내 모습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서… 차라리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 싶어서… 회피하고 싶어서… 결국은 그 “싫다”는 것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싫음”은 저의 우상입니다. 제가 주인처럼 섬기고 있는 저의 바알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마치 하느님처럼 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년 반이나 지난 일들이 아직도 저를 좌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라갔다”는 표현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신들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기억들이, 누구의 탓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해도 어쨌든 상처를 입은 감정들이, 화해하지 못한 마음들이 저를 끌고 다닙니다. 제가 그 우상들을 부수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씨름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 우상들 뒤에 안전하게 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창세 32,25). 야곱이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싸움을 걸어오십니다. 야곱이 앞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우상과 하느님께서 겨루십니다. 하느님과 끝까지 싸워 낸다면 야곱은 앞으로 갈 것입니다. 싸움에 진다면 뒤돌아서 물러나 다시 우상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는 바알의 종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꺾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억센 하느님의 뜻을 피해서 도망가지 않고 그 뜻을 받아 삼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겨루십니다. 야곱이 자기 우상들을 버리도록 그와 싸우십니다.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32,27). 야곱은 타협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겨루고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합니다. 우상들을 부수어 버리려니 이제는 하느님의 축복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는 끝까지 하느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32,32). 어둠이 지나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의 앞을 가리던 우상들에게서 해방될 때까지 그는 하느님과 씨름하고 하느님은 그와 씨름하십니다. 

 

에사우를 만난 야곱이 말합니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33,10). 야곱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야뽁 건널목에서 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야곱이 청했던 것이 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32,12). 야곱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과 에사우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에사우가 야곱을 용서하지 못하고 내내 벼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제가 붙잡고 있던 우상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내려놓으면 죽을 것처럼 우상에게 의존하면서 비굴하게 하느님의 도전을 회피하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하느님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원한, 주고받은 상처들, 채워지지 않은 어린 시절 등으로 현재의 모습을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내가 하느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구실이 되지는 않는지요? 내가 사람들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요구들을 물리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따라가는 “다른 신들”이고 내가 부수어버려야 할 우상들입니다. 우상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야곱처럼, 다른 신들을 따라가려는 유혹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땅끝까지 제77호, 2013년 9+10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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