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루터기] 아브라함과 고모라 아브라함,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나이 75세에 하느님께서 집을 떠나라고 하시니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떠난 인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고, 그는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도 일은 뜻대로 되어가지 않습니다. 창세기 18장입니다. 아브라함이 더운 한낮에 천막 앞에 앉아 있는데 손님들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가만히 평탄하게 살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끼어드시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잘 접대해 주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세 사람”과 “주님”이 서로 겹쳐집니다. 그 세 손님은 결국 하느님이십니다. “내년 이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 18,10). 아들을 주시라고도 청하지 않았는데, 벌써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났고(16장), 아브라함은 그가 오래오래 잘 살기만을 기원했는데도(17장), 굳이 그에게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볼 때에는 별로 가능하게 보이지도 않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 가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본문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들렀던 세 손님은 자신들이 소돔과 고모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저지르는 악행 때문에 들려오는 원성이 너무 커서 그것을 확인해 보고 그 두 도시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끼어듭니다.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18,24)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마시기를 청하면서, 의인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하게 하신다면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18,25)라고 말합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느님은 그에 따라 행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한 요구 같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의인 쉰 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18,28)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18,29)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18,30)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18,31)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18,32) 아브라함은 여섯 번에 걸쳐 하느님께 청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마지막에 청한 대로 열 명을 보아서라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그 자리를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간절하게, 하느님께 노여워하지 마시라고 애원하면서 청하고 또 청했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청한 것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획을 들어 알게 되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전달 역할을 하는 것 - 이것은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창세기 20장 7절에서는 아브라함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언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대신하여 그 백성을 살려 주시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도 실패한 예언자들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실패한 예언자들은 사실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에제키엘, 이사야… 여러 예언자들에게서 그동안 보아 온 것처럼, 예언자의 사명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을 때 백성이 그 말씀을 반드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언자들이 사명을 다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을, 자신들의 역할을 다 한 것이었습니다. 전하는 것, 거기까지가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린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역으로,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청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사람으로서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하느님이 진노하실까 염려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며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18,26). 그러나 그 결과가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몫을 다 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에, 시간이 흐른 다음에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역사를 이야기했겠지요.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해야 했을까?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던가?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의 이야기는,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를 아꼈음을 보여 줍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런데도” 멸망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의롭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도 아니었고, 아브라함이 그 도시들을 안타까워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도시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은 다시 하느님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19,27-28).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어 롯을 건져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상의 일은 이제 아브라함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없이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주님께 간청 드렸던 일을 기억했겠지요. 아브라함의 말이 없는 다른 장면과 겹쳐집니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는 장면입니다(22장). 바라지도 않았던 아들을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그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하인들은 중간에 머물러 있으라 하고 이사악과 단둘이 걸어갑니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22,7-8). “야훼 이레…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 ”(22,14). 처음에 우리가 출발했던 창세기 18장으로 돌아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이나 다른 누가 아닌 바로 그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습니다. 이사악을 죽이기를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인가? 그것 역시 아브라함이 알 몫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죽지 않게 하시고 다른 방법을 찾으시리라고 미리 안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히브 11,19). 아브라함에게 갈등이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거나 이사악이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을 때에도 태평했음을 뜻할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없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깊이 묻혀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았던 그만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임을 체험으로 알았을까요? 예언자로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보였을 때, 이제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들을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아들을 주셨다가는 다시 그 아들을 요구하시는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느님의 마음 속 생각을 잘 알아서 그분을 믿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나의 말을 꼭 들어 주시리라고 여겼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무런 전망이 없어 보이는 방법으로도 그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대답 없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아브라함은 그런 하느님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눈앞에서는 어떤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께 간청해도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그래도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땅끝까지 제78호, 2013년 11+12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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