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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가톨릭 신앙의 보물: 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7 조회수3,929 추천수1

[가톨릭 신앙의 보물] <1> 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상)


성경 대할 때 학문, 영성, 실천적 측면 고려해야



신자들은 교회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 2000년 동안 이어온 교회는 가톨릭 신앙의 다양한 전례와 전승을 통해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에 풍성한 은총을 제공하고 있다. 그 은총은 교회의 보물인 전례와 전승의 참 의미를 깨달을 때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다. 교회의 전례와 전승을 신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 평화방송 TV 프로그램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을 연재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사용한 칠십인역 성경. 성경을 읽을 때는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영성적 접근과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세 가지 기준

성경을 읽는 가톨릭 신앙의 고유한 관점에 대해 살펴보자.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는 성경에 영감을 주신 성령을 따라 성경 해석을 위해 세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첫째, 성경 전체 내용과 단일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구성하는 복음서가 아무리 다양해도 실제로 성경은 하느님 구원 계획의 단일성으로 하나다. 구약과 신약도 단일성을 갖고 있다. 모든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둘째,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의 문서ㆍ기록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성경은 교회의 마음 안에 적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영적 해석을 내려주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실제로 교회는 성전 안에 하느님 말씀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셋째, 신앙의 유비에 유의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신앙의 유비는 신앙 진리 상호 간의 일관성과 계시의 전체 계획 안에 있는 신앙 진리의 일관성을 말한다. 신약은 구약에 감춰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 보통 구약을 공부하다 보면 구약의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 심판하시는 분,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신약의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보인다. 하지만 같은 하느님이 구원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 밝혀진 하느님 계획의 중심이며 심장이다. 구원 계획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세 가지 기준을 갖고 접근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하고 하느님 말씀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성경은 구약의 창세기에서 시작해 신약의 요한 묵시록으로 끝난다. 성경의 시작과 끝은 구원을 향한 보편적인 전망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죄 탓에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달리 요한 묵시록은 다시는 죽음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에 사용된 어휘는 요한 묵시록에도 사용된다.

가톨릭교회 고유 모임인 세계 성서사도직 연맹회의가 2008년 개최됐다. 각국의 성서 모임 대표들이 5년 주기로 모여 회의를 한다. 2008년 회의 주제가 하느님 말씀에 관한 것이었다. 하느님 말씀이 교회 사명과 선교 사명에 어떻게 긍정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실천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이에 대한 신앙인의 관심 촉구가 이 시대 과제로 부각됐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하느님 말씀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의 삶에 얼마나 뿌리 내리고 열매를 맺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이렇듯 성경을 바라보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경이 지니는 세 가지 중요한 관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첫째, 성경 본문은 학문적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개인이 성경 구절을 읽으며 느끼는 것들이 성경 저자가 실제로 전하려는 것이었을까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학문적 접근으로 성경을 숙독하고 면밀하게 역사적ㆍ학문적 관점에서 성경 본문이 말하려는 것을 찾아야 한다. 본문이 내포한 하느님의 거룩한 계시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학술적이고 역사적 검증으로 연구 검토해야 한다.

둘째, 성경 본문은 그 성경 본문을 읽는 독자 각자의 삶의 상황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독자와 무관한 과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의미를 재해석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는 영성적 접근이 필요하다. 학문적 영역이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 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볼 때 꼭 학문적 영역으로만 접근해야 하는 건 아니다. 여기는 신앙의 믿음이 관련돼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 본문을 읽은 독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그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고 깨달은 의미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공동체 전례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

신앙으로만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 해석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톨릭 신앙만의 고유한 방법들, 즉 이 세 가지 기준과 관점에 따라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귀중한 것을 가질 수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7일,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 정리=백영민 기자]

 

 

[가톨릭 신앙의 보물] <2> 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하)


말씀 잘 뿌리내리도록 마음의 토양 가꿔야



지난 호에서는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살펴봤다. 이제 이 관점을 잘 적용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장)를 살펴보자. 복음에서 비유적 상징으로 묘사된 씨앗은 마음의 토양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을 뜻한다. 씨앗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서서히 성장하면서 풍요로운 결실을 얻으리라는 희망이다. 이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

첫째는 길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버린 씨와 같은 사람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 경우다. 말씀을 자신의 방법대로 수용한 사람도 포함한다. 하느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경우다. 이는 맹목적 가치관과 편견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 즉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진 이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씀을 자기 방법으로 이해하기에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향해 부정적 시각에 노출돼 있어 주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한다.

이 사례를 요나서에서 볼 수 있다. 요나는 니네베가 멸망한다는 심판의 말씀을 선언하라는 계시를 받고 기뻐했다. 니네베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자 심판을 철회하셨다.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나 주님께 기도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나의 이런 행동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요나는 아주까리 나무를 통해서야 하느님 자비를 깨닫게 된다.

사실 요나는 연민이나 동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요나의 문제는 자신의 삶이나 필요성에 따라 감정이 일어난 것이다. 요나는 니네베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지 못했다. 이는 길 위에 떨어진 씨앗, 즉 자기의 관념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다.

둘째 유형은 돌밭에 떨어져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다. 돌밭에서도 식물은 어느 정도까지 자라나지만 뿌리가 오래가지 못한다. 이는 한때 믿다가 환란이나 시련을 겪으면 넘어지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를 욥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욥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삶의 고통과 시련에 직면해서 "내가 의롭고 죄 없이 살았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느님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했다. 물론 욥은 흠 없이 살아간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욥의 시련과 고통을 바라보며 인간 존재가 무엇이며 삶의 궁극적 목표가 뭔지 가르쳐 주신다. 욥은 하느님께 "저에게 왜 고통을 주십니까. 왜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하느님은 뜻밖의 대답을 한다. 창조 때 일어난 일을 욥에게 물으시며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욥은 드디어 깨닫는다. 인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희로애락을 느끼지만, 하느님은 우주의 한점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들여다보게 하신다. 이는 자신의 울타리, 인간 중심적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 창조구원 계획을 하느님 자유에 따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무죄한 이들이 왜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이루신다는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모두 우리의 뜻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 통해 얻는 하느님 은총의 열매

셋째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는 하지만 결국 가시덤불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탐욕,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인간 본연의 모습을 황폐하게 이끄는 것을 뜻한다.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2-31).

마지막은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잘 성장한 사람이다.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자 마음의 토양을 기름지게 할 필요가 있다. 곧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해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을 의미한다.

복음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서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살펴봤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제시한 해석에 따라 성경 본문을 읽고 세 가지 관점에서 되새기고 숙지할 수 있다면 내면의 영성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앙이 주는 보물처럼 중요한 성경해석 방법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주님 말씀을 올바로 듣고 거기에 머물고자 애쓴다면 사람들 목소리, 진실을 듣는 기회가 더 풍부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사회와 공동체 안에 뿌리내리도록 자신의 신앙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고 숙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의 열매가 아닌가 한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24일,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 정리=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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