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해설과 묵상 (86) 열왕기의 기원자료와 편집 1 열왕기 상하권에는 다양한 자료가 산재해 있는데, 그 성격이 서로 다른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다양한 자료를 신명기적인 틀 속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진 ‘열왕기 상하권’을 탄생시켰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오래된 자료들을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몇몇 기원자료들은 열왕기에 명백하게 언급되었다. 이것은 열왕기가 단숨에 쓰인 책이 아니고 다양하고 긴 과정을 거쳐 형성된 책이라는 것을 뜻한다. 열왕기의 기원사료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왕조실록 열왕기 상권 11장과 14장과 그 밖에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듯이 기본적인 기원사료는 ‘왕조실록’이다. 왕조실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솔로몬의 실록’과 ‘이스라엘 왕조실록’ 그리고 ‘유다 왕조실록’은 오늘날 우리 손에 있는 열왕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솔로몬의 실록’은 열왕기 상권 3-11장의 솔로몬 설화 끝부분에 나타난다. “솔로몬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에 관한 것은 솔로몬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1열왕 11,41). 오늘날 우리 손에는 ‘솔로몬의 실록’이 없지만, 열왕기 상권 11장 41절은 ‘솔로몬의 실록’이 어떤 책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좋은 정보가 된다. 여기서 ‘지혜’라는 단어는 ‘솔로몬의 실록’이 솔로몬의 지혜에 관련된 전설적이고 민담적인 자료라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이 실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기브온에서 있었던 솔로몬의 꿈(1열왕 3,4-15), 아기에 관련된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1열왕 3,16-28), 어려운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하려고 온 스바의 여왕 이야기(1열왕 10,1-13) 등. ‘이스라엘 왕조실록’은 각 임금들에 관한 기록의 결말부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열왕기 상하권을 통틀어 17번 언급된다. 이 왕조실록이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예로보암 1세의 치세를 평가하는 결말부이다(1열왕 14,19).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페카의 통치 마지막 부분이다(2열왕 15,31). 그러나 예후 혁명의 희생자인 아합의 아들 요람(2열왕 9,21-26), 그리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2열왕 17,1-6)에 관한 대목에서는 ‘이스라엘 왕조실록’을 언급하지 않는다. ‘유다 왕조실록’은 르하브암 통치 결말부(1열왕 14,29)에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여호야킴의 치적 결론부(2열왕 24,5)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다. 열왕기 상하권을 통틀어 15번 언급되었다. 그러나 다음 네 명의 임금의 치적을 말할 때는 ‘유다 왕조실록’을 언급하지 않는다. 아하즈야(2열왕 9,27-29), 여호아하즈(2열왕 23,31-34), 여호야킨(2열왕 24,8-9), 치드키야(2열왕 24,18-20)는 죽음의 상황이 예외적이라 틀에 박힌 양식을 적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죽은 마지막 임금들에 관한 대목까지만 왕조실록이 인용된 것을 보면, 이런 작품들은 두 왕국의 멸망까지만 썼는데, 이 작품들이 남북왕국 멸망 당시에 쓰였다기보다는 그전부터 계속해서 기록되어 대중에게 읽혀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실록은 오늘날 열왕기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더구나 열왕기에 들어온 왕조실록도 그 전부가 있는 그대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기원자료들이 더 있음은 명백하다. 묵상주제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시편 2,10-11). [2014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87) 열왕기의 기원자료와 편집 2 2. 고문서고 자료 솔로몬 왕궁 관리들의 목록(1열왕 4,1-6), 지방관리들의 목록(1열왕 4,7-19; 5,7-8)은 왕궁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성전건립 비품에 관한 묘사(1열왕 6장. 7,15-31)는 예루살렘 성전 고문서고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 가운데 어떤 부분이 이미 기록된 자료들에서 왔고 구전전승(口傳傳承)에서 왔는지를 판별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3. 예언자들의 이야기 열왕기는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많은 부분을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에 할애한다.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그 제자들에 의해 보존된 기억에 근거한다.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자료가 있다. 엘리야 자료, 엘리사 자료 그리고 이사야 자료다. 엘리야 자료는 열왕기 상권 17-19장과 21장 그리고 열왕기 하권 1장에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북쪽 지파들 사이에서 독립된 전승단위로 떠돌아다니다가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전승이 형성되었으나 구전을 통해 내려오면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상상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에 사실성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엘리야 자료는 역사에서 출발하여 전설로 변형된 일례다. 엘리사 자료는 열왕기 하권 2-13장에 나온다. 엘리사 자료는 엘리야 자료와는 다른 전승에서 왔다. 문학적 표현이나 관점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저자가 엘리야 이야기와 엘리사 이야기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전승이 동일한 환경에 속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병행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열왕기 상권 17장 8-16절(사렙타 과부에게 베푼 밀가루와 기름 기적)과 열왕기 하권 4장 1-7절(과부의 기름 기적). 열왕기 상권 17장 17-24절(과부의 아들의 소생 기적)과 열왕기 하권 4장 18-37절(수넴 여인의 아들의 소생 기적). 이사야 자료는 히즈키야 통치에 관한 서론부(2열왕 18,1-12)와 결론부(2열왕 20,20-21) 사이에 있다. 열왕기 하권 18장 13절-20장 19절이 이사야 자료에 해당한다. 이 자료는 이사야 예언자에 관한 독립된 이야기 모음이 열왕기에 편입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의 내용은 열왕기 하권 18장 14-16절을 제외하고는 이사야서 36-39장과 내용이 같다. 그러면 열왕기의 이사야 자료와 이사야서 36-39장 가운데 어느 것이 시기적으로 더 먼저인가?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열왕기의 이사야 설화가 이사야서에 이식되었다. 소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간간이 등장한다.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1열왕 11,29-39; 14,1-18)과 그 실현(1열왕 12,15; 15,29)은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교훈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믈라의 아들 미카야(1열왕 22,13-28)의 이야기도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가 아직 구전전승의 과정을 거치고 있던 독립적인 예언자 전승을 그의 책에 이용한 예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1열왕 13장. 2열왕 21,10-15)도 있는데, 이 역시 그 문학형식은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필치다.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관련된 임금들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모아졌다. 그것은 그 임금들이 동시대라는 이유 때문이고, 또 예언자들이 그 임금들에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묵상주제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을 받들어 불러라. 그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그분께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을 이야기하여라”(1역대 16,8-9). [2014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88) 열왕기의 기원자료와 편집 3 4. 기타 자료들 위에 언급된 세 개의 기원자료 외에도 다양한 사료들이 더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합 자료’와 ‘요시야 자료’다. 엘리야 자료를 중단시키는 아합 이야기(1열왕 20장. 22장 1-38절)는 앞에서 묘사된 아합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여기서 아합은 용감한 임금으로 제시된다(1열왕 22,9.35). 또한 아합 자료는 시리아 사람들에게 특별한 적대감을 나타내며 시리아 전쟁에 관심이 많다. 그러므로 아합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자료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요시야 임금에 관한 이야기(2열왕 22,1-23,30)는 왕조실록이 아닌 다른 자료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으로 열왕기의 기원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한 자료가 어떻게 하나의 책으로 모아질 수 있었을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편집작업이 이루어졌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일저자가 열왕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왕기 상권 8장 계약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모시는 사건은 기원전 961년이고, 열왕기 하권 25장 27-30절에 나오는 여호야킨의 은덕사건은 기원전 561년이다. 만일 단일저자가 열왕기를 썼다면 그는 최소한 400년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왕기는 여러 사람의 작업과 편집을 거친 책이다. 그러면 누가 이 책을 편집했을까? 여러 가지 가정이 제시되었지만,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이론은 열왕기가 신명기 학파 역사서의 일부라는 이론이다. 최초의 편집자는 열왕기 상권 12장(스켐 회의)에서부터 열왕기 하권 20장(히즈키야 통치)까지를 편집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 편집자는 주로 남북 임금들의 연대기와 왕조실록에 근거해 작업했고 동시에 구전전승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을 체험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사제로서 기원전 580년경 팔레스티나에서 열왕기의 이 부분을 썼던 것 같다. 그 다음 편집자는 한 세대 뒤 곧 550년경부터 538년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귀환하기까지 역시 팔레스티나에서 전임자의 작품을 다시 작업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이야기와 전승을 첨가했다. 이 둘째 편집자가 첨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다윗 왕위 계승설화(2사무 9장-1열왕 2장),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 이야기(2열왕 18-19장), 스바 여왕의 방문 이야기(1열왕 10장), 이런 부분에서는 특별히 예언자들의 역할이 부각되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둘째 편집자가 예언자 집단에 속한 사람이고, 아마도 예레미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최종편집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이루어졌다. 레위지파 출신의 서사들에 의해 약간의 첨가가 있었을 뿐, 이전에 형성된 책에 큰 변화는 없었다고 본다. 묵상주제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께서 이루신 기적들을, 그 이적들과 그 입으로 내리신 판결들을 기억하여라”(1역대 16,10-12). [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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