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십자가 형 고대 이스라엘의 사형은 석형(石刑)이었다.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법에 따른 조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석형을 받으셨을 것이다. 아시리아 때부터 십자가형은 있었다. 고대 왕궁터에서 국가 반역자를 나무에 달아 죽인 부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800년경의 일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도 십자가형을 실시했다. 반발하던 바빌론 주민 3천 명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페니키아를 점령한 뒤 2천 명의 주민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강력하게 저항하던 티로의 남자들이었다. 기원전 3세기를 지나면 민족 대부분은 십자가형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전시효과가 강렬했다. 사형수는 먼저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쓸데없는 반항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그런 뒤 십자나무를 메고 처형 장소까지 갔고 발가벗겨진 뒤 나무에 달렸다. 집행관들이 쇠못을 팔목 조금 위쪽에 박았다. 나뭇조각을 대고 박았다.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발목에도 못을 박았다. 그러면 가슴에 엄청난 압박감이 온다고 한다. 압박감을 덜기 위해 서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서히 죽어갔다. 시체는 대부분 십자가에 달아뒀다. 날짐승이 먹거나 흉한 상태로 없어지게 했다. 십자가 꼭대기에는 죄명 패를 달았다. 유죄 선고문이었다. 예수님의 선고문은 히브리말과 라틴말과 그리스말로 씌어 있었다(요한 19,20).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들도 죄명 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십자가 나무는 대부분 올리브 나무였다. 십자가형은 정치범이나 종교적 선동자 또는 해적이나 노예들에게 선고되었다. 로마 시민은 예외였다. 명백한 반역죄가 아니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없었다. 반역이 확실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십자가형은 받을 수 없었다. 이렇듯 수치와 분노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였지만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앙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승화시킨 것이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운명의 대결을 펼친다. 승리자가 황제로 추앙되는 싸움이었다. 전투 직전 그는 십자가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후 모든 군기(軍旗)에 십자가를 새기게 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황제가 되었다. 이듬해(313년) 밀라노의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 박해를 종식했다. 그리고 337년에는 제국 내에서 십자가형을 폐지했다. [2014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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