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8)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수난 당하시기 전날 저녁에 당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잡수셨다. 이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설정하셨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삶에서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승은 그 시초에서부터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장소를 찾고, 기억 · 기념하였다.
■ 위치와 지형
오늘날 시온 산(Mount Sion)은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을 가리킨다. 이곳은 해발 765m의 높이로 구시가(Old City)의 남쪽 성벽에 있는 시온의 문(Sion Gate) 밖에 위치하는데, 서쪽과 남쪽에는 힌놈 계곡(Hinnom Valley)이 있고 동쪽으로는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이 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시대에 시온이라고 불린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이었다.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7) 시온이라는 이름이 서쪽 언덕을 가리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인데, 미카 3,12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되리라.”(미카 3,12) 여기에서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보르도(Bordeaux)의 순례자들(기원후 333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예루살렘의 두 언덕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동쪽 언덕이 성전산(Temple Mount)이었다면, 서쪽 언덕은 시온 산이었다.
현재의 시온 산 지역이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벽 안에 포함된 것은 기원전 2세기였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파괴하였는데, 현재의 남쪽 성벽은 기원후 135년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 주둔지의 남쪽 경계였다. 444년-460년 사이에 로마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는 시온 산 부근의 옛 성벽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이 성벽은 975년까지 존속했는데, 칼리프 엘-아지즈(el Aziz)는 그것을 무너뜨렸다. 살리딘(Saladin)은 다윗의 무덤을 포함하기 위하여 십자군의 성벽을 연장하였다. 기원후 16세기 술탄 슐레이만 2세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시온 산 지역은 성벽 바깥에 위치했다. 비잔틴 시대인 6세기의 마다바(Madaba) 지도에는 당시의 시온 산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시온 산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성모 승천 기념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이 있다.
■ 신약 성경의 기록
오랜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마르 14,22-26)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요한 20,19-23),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모임(사도 1,12-14)과 성령 강림(사도 2,1-13) 등의 사건들은 시온 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르 14,12-16; 마태 26,17-19; 루카 22,7-13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에 준비된다. 그리고 최후 만찬 이야기는 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1코린 11,23-25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요한 20,19-23에 소개된다. 사도 1,12-14에는 사도들이 모여 있던 성안의 위층 방이 언급되고 사도 2,1-3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고 전한다.
■ 중요 순례 장소
① 최후 만찬 기념 경당
시온의 문을 통과해서 시온 산으로 좁은 골목길로 가면 하나의 첨탑과 작은 둥근 지붕을 가진 중세 시대의 건물을 만나는데, 아래층에는 다윗의 묘지가 있고 위층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이 있다. 이 경당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객관적인 근거는 불확실하지만, 이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미 5세기 초에 이 전통에 대한 기록이 있다. 403년에 죽은 성 에피파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도시는 티투스가 파괴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예외적으로 몇몇 건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사도들이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장소에 세워진 작은 성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최후 만찬의 장소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과 함께 시온 산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것은 사도들이 모여 있던 “위층 방”(사도 1,13; 2,1)을 최후 만찬이 거행된 “이층 방”(마르 14,15)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르도의 순례자들은 이 사건들과 시온 산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에제리아(Egeria)는 성령 강림과 관련 있는 건물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이 장소는 이제 성당으로 변화되었다.”라고 말하고 시온 산의 성당에서 주님의 발현과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고 기억한다. 그 후 파괴된 성당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은 이 성당을 파괴하였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성당은 성벽 바깥에서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당을 재건하였는데, 이 또한 그 후 파괴되었다. 마침내 1333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큰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그런데 이 성당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 출입을 허용하였으나 전례 거행은 금지하였다.
②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경당의 아래층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다. 유다인들에게 이 장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성소의 하나이다. 사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은 그의 성 동쪽 언덕 위에 묻혔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1열왕 2,10)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을 시온 산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10세기까지는 그 누구도 그곳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십자군 시대에는 시온 산의 다윗 무덤을 경배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라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시온 산과 다윗의 무덤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다인들도 12세기부터 이곳을 순례하였다. 15세기에는 다윗 임금과 함께 매장된 전설적인 보물(『유다 고대사』 16권 179-182)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4세기에 이곳을 재건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추방되었다. 다윗의 무덤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가 1948년 이후에는 유다교 회당과 탈무드 학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다윗의 무덤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유다인, 이슬람인의 신심에 의한 것이다.
③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서 나와 약 100m 가량 걸으면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의해 세워진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936년에 건립되었는데,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세워졌던 옛 성당의 한 부분 위에 세워졌다. 성당은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을 향하여 있어 Ad Coenaculum이라고 불렸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4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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