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해설과 묵상 (92)
“솔로몬은 에브야타르를 주님의 사제직에서 내쫓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실로에 있는 엘리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1열왕 2,27). 열왕기 상권 1-2장은 사무엘기 하권 9장부터 시작된 다윗 왕위계승 설화의 결론이다. 아도니야가 다윗의 임금 자리를 이어받을 것처럼 임금행세를 했지만, 결국은 전혀 뜻밖의 인물인 막내 솔로몬이 임금으로 등극했다. 아도니야가 제거되고, 에브야타르가 사제직에서 쫓겨나 낙향하고, 시므이가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기원전 970년경 다윗의 임금 자리를 놓고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벌인 싸움에서 다윗조정의 대신들과 군부와 사제들은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도니야 편 = 총사령관 요압, 사제 에브야타르, 모든 왕자. 솔로몬 편 = 사령관 브나야, 사제 차독, 예언자 나탄, 크렛 사람들, 펠렛 사람들. 과연 누가 임금이 될 것인가? 아도니야가 임금이 되면 솔로몬을 지지한 사람은 모두 제거되어야 했고, 솔로몬이 임금이 되면 아도니야 편에 선 사람이 모두 죽어야 했다. 대세는 아도니야의 편으로 기우는 듯했지만 결국은 솔로몬이 임금 자리에 올랐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지지한 사람을 모두 제거했지만 사제 에브야타르는 차마 죽일 수 없어 고향으로 쫓아버렸다. 그는 사제 엘리의 후손이었고, 아버지 다윗과 동고동락한 사제였기 때문이다. “아나톳에 있는 그대의 땅으로 가시오. 그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느님의 궤를 날랐고 또 아버지와 온갖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 그런 다음 솔로몬은 에브야타르를 주님의 사제직에서 내쫓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실로에 있는 엘리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1열왕 2,26). 이는 사무엘기 상권 3장에서 주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 가문에게 내리신 말씀의 실현이다. “그날, 내가 엘리 집안을 두고 말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거슬러 이루고야 말겠다”(1사무 3,12).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역사서 전체를 꿰뚫는 주제가 여기서 다시 강조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사무엘기 상권 2장에도 엘리 집안에 내리는 심판의 말씀이 나오는데, 익명의 예언자가 엘리에게 전한 형태로 되어 있다. “나는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일으키리니,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내가 믿음직한 집안을 그에게 일으켜주고, 그가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이 앞에서 언제나 살아가게 하겠다”(1사무 2,35). 여기서 ‘믿음직한 사제’는 차독 사제를,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는 솔로몬 임금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솔로몬 시대부터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직은 차독과 그 후손이 독차지했다. 아나톳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진 고을이다. 아나톳으로 쫓겨난 사제 에브야타르의 후손 가운데 유명한 예언자가 나왔으니 그가 예레미야 예언자다. 예레미야는 솔로몬에 의해 쫓겨난 사제 가문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직을 독점한 차독가문의 사제들과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기원전 970년경 예루살렘의 사제직을 독점한 차독 가문은 예수님 시대까지도 사제직을 독점했는데, 이들이 사두가이들이다. 천 년 이상 사제직을 독점했던 것이다. 묵상주제 기원전 1050년경 엘리 가문에 내린 말씀은 기원전 970년경 솔로몬 시대에 실현되었고, 기원전 620년경 예레미야 시대를 거쳐 예수님 시대까지 여파를 끼쳤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2014년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93)
“임금은 요압의 자리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임명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에브야타르의 자리에는 차독 사제를 임명했다”(1열왕 2,35).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임금 자리에 오른 다음, 자신의 왕권을 굳건히 하려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숙청했다. 왕권을 놓고 다퉜던 아도니야를 가장 먼저 죽였다. 이어서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던 총사령관 요압을 성전에서 죽이고,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을 심하게 모욕했던 시므이를 처단했다. 이는 아버지 다윗의 유언과 법에 따른 것이었지만 자신의 왕권에 적대적인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솔로몬은 이들을 제거하고 군대 총사령관에 브나야를 임명하고, 에브야타르 사제 대신 차독 사제를 임명했다. <노자>(老子) 17장에는 네 부류의 왕이 나온다. 1. 태상 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가장 좋은 왕은 백성이 왕이 있다는 것만 알뿐이다. 2. 기차 친예지(其次親譽之). 그 다음은 백성이 가까이하고 기리는 왕이다. 3. 기차 외지(其次畏之). 그 다음은 백성이 두려워하는 왕이다. 4. 기차 모지(其次侮之). 그 다음은 백성이 업신여기는 왕이다. 태상 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는 노자가 생각하는 최상의 정치다. 이는 곧 무위지치(無爲之治)요, 불인(不仁)하여 편애(偏愛)가 없는 다스림이다. <장자>(莊子) 천운편은 “성인이 이로움과 혜택을 만세에 베풀어도 천하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利澤施於萬世天下莫知也)라 했다. 이것이 최상의 다스림이다. 백성이 가까이하고 기리는 왕(親譽之)은 공자(孔子)가 이상으로 여기는 왕도정치를 말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덕으로 백성을 다스린다. 백성이 두려워하는 왕(畏之)은 법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법대로 처리한다. 법이 규정한대로 상벌을 내리므로 백성은 그를 두려워한다. <장자> 천도편은 “상과 벌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도모하고 다섯 가지 형벌을 정하는 것은 가르침의 말단이다”(賞罰利害五刑之敎之末也)라 했다. 백성이 업신여기는 왕(侮之)은 힘과 무력과 금력에 의존한다. 이는 독재정치, 공포정치를 말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야 하는데, 이 기본권이 박탈당하면 백성은 통치자를 멸시하고 결국은 통치자에게 저항한다. 하상공(河上公)은 “금하는 것이 많고 명령이 복잡하면 백성이 진실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통치자를 속이고 멸시한다”(禁多令煩不可歸誠故欺侮之)고 했다. 다윗은 백성이 가까이하고 기리는 왕이었고, 솔로몬은 백성이 두려워하는 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던 종래의 임금이 아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내리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바쳐 백성을 섬긴 임금이다.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대로 ‘수난 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며 백성을 섬기신 분이다. 노자가 말한 네 부류의 왕 가운데서 가장 좋은 첫째 왕에 해당하는 분이다. 곧 백성이 왕이 있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당신 자신을 낮추고 봉헌하신 분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섬기고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묵상주제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2014년 4월 20일 예수 부활 대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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