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나는 누구인가 (4) 아담을 빼닮은 카인, 카인을 닮은 우리? 아담 내외는 약속이나 한 듯이 범죄에 대한 회개는 고사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부끄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타락을 문제 삼기에 앞서 당신께 등 돌린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까 고심하신다. 그분은 당신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인간을 일단 낙원에서 추방하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아담부부]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3,23). 그러나 이로써 하느님께서 인류를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그분과의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인류구원이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영원하신 분께서는 아담 부부가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영원하신 분 마음은 예수님 비유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아담은 자기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하와’는 산 이의 어머니요 인류의 어머니란 뜻이다. 히브리말 ‘하야(생명)’에서 나온 이름이니 결국 축복을 담은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류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고 그와 더불어 은총까지 담아주신다. 그분께서 이루시는 인류구원의 신비를 엿보게 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아담부부에게 옷을 입혀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영원하신 분의 자비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3,21). 창조주를 등지고 타락한 아담에게 내리시는 그분의 끝없는 자비를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부지런히 아버지께 돌아와 예전에 선사하신 낙원의 축복을 되찾기를 고대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엿보이는 구절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 실낙원의 인간,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어둡기 그지없었다. 삽시간에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카인의 범죄는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됐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4,3-5ㄱ). 이어서 성경은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4,5ㄴ)고 말한다. 아주 작은 일로도 쉽게 화를 내며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인간의 모습, 어찌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그때 카인은 아벨에게 들판으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4,8ㄴ). 너무도 쉽사리 저질러진 그러나 엄청난 사건이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4,7ㄱ)는 말씀을 들은 카인이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여 개선할 생각, 그래서 다음에는 칭찬받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님께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ㄱ) 하고 물으신다. 카인의 대답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ㄴ)였다. 아! 카인은 어쩌면 그렇게도 아담을 빼닮았을까? 아담처럼 하와처럼 그냥 책임을 회피하는 즉흥적 대답,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뻔뻔스런 카인의 모습. 어쩌면 수없이 알게 모르게 되풀이해온 ‘우리의 모습’을 일깨우는 장면이 아닐까? 적어도 얼마 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해주었던 ‘세 모녀의 ㉨㉦ 사건’을 보고도 깨우침이 없었다면, 우리는 카인처럼 그렇게 주님께 대답하는 사람이 아닐까? ‘제가 세 모녀 지킴이라는 말입니까?’라고! * 신교선 신부는 1979년 사제수품 후, 스위스 루체른 대학교에서 성서주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원과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역임, 현재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와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인천 작전동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8일, 신교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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