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헤로데 아그리파 2세 아그리파 1세 아들로 헤로데 가문 마지막 통치자다. 부친이 죽을 때 17세였다. 어리다는 이유로 로마는 실권을 주지 않다가 23살 되던 해(AD 50년) 시리아의 작은 도시 칼키스를 맡겼다. 그를 통해 유다인과의 관계개선을 원했다. 3년 뒤는 필리포스 1세(루카 3,1)가 다스리던 땅까지 받게 된다. 갈릴래아 호수 동쪽 땅이다. 54년 황제가 된 네로는 아그리파 2세에게 갈릴래아 지역 전체와 요르단 강 동쪽의 데카폴리스 지방까지 주었다.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유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것이다.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도 위임되었다. 당연히 친 로마정책을 폈다. 반란을 막기 위해 전력을 쏟았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66년 갈릴래아 북쪽 카이사리아 항구에서는 유다인 대량학살이 자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곳 로마 행정관의 소행이었다. 즉시 예루살렘에서 열혈당원들이 봉기했다. 유다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아그리파는 중재에 나서지만 실패한다. 로마군을 보내 진정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이듬해(67년)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반란군 제압을 시작했다. 1차 독립운동의 출발이다.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반란군을 섬멸했다. 아그리파 2세는 로마군을 도왔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넓은 영토를 할당받았다. 93년까지 생존했고 자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그리파 2세는 사도행전 25장에 등장한다. 카이사리아의 총독이었던 페스투스가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다(사도 25,14). 당시 바오로는 유다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상소 중이었다. 아그리파는 만나고 싶어했다.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설교에 호감을 가진다. 이후 총독 페스투스는 바오로를 로마로 이송했다. 사도행전에는 아그리파가 베르니케와 동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베르니케는 아그리파의 한 살 아래 여동생으로 둘은 로마 황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르니케는 첫 혼인에서 남편이 사별한다. 재혼 역시 실패한다. 이후 오빠와 혼인했는데 당시 왕족 사이에선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율법을 내세워 반대했고 아그리파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티투스 장군은 혼자된 베르니케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다. 그만큼 매력 있는 여인이었다. [2014년 7월 6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