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카이사리아 카이사리아(Caesarea)는 사마리아 북서쪽 지중해 연안에 건설된 항구 도시다. 베드로는 이곳에 살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이방인을 할례 없이 교회로 받아들인 첫 사례다(사도 10,48). 이 일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는 사건이 된다.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선포된 것이다. BC 13년경부터 로마 총독과 군대는 카이사리아에 거주하며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도시가 팽창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방인과 유다인은 자주 부딪쳤다. 종교와 관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기원후 66년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다인이 죽임을 당했다. 사실이 알려지자 예루살렘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1차 독립운동(66~70)의 시작이다. 70년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들을 제압했다. 포로들은 카이사리아로 끌고 가서 살해했다. 2차 독립운동(132~135) 뒤에는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고 카이사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카이사리아에 머물렀다(사도 21,8). 이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붙잡힌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죽이려 카이사리아에 있는 총독에게 데려갔다. 2년간 구금되어 있으면서 총독 페스투스와 임금 아그리파 2세를 만났고 그들 앞에서 변론하였다(사도 24-26장). 바오로가 로마 시민임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자 로마로 보내졌고(사도 27,1) 그곳에서 순교했다. 이렇듯 카이사리아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또 다른 중심지였다. 원래 이곳은 고대 페니키아인의 주거지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땅을 헤로데에게 하사했고 헤로데는 12년 공사 끝에 항구를 완성했다. 기원전 13년경이었다. 황제에게 도시를 바친다는 의미에서 카이사리아(Caesarea)라 했다. 초대 황제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채사르(Caesar)에서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영어에서는 시저(Caesar) 독일어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어는 차르(czar)로 음역했다. 지금은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항구 건설에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수중공법이 동원되었다. 물위에 틀을 만들어 띄운 뒤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이었다. 당시론 획기적 공법으로 세계 최초였다고 한다. 북쪽 방파제는 200m 남쪽 방파제는 500m에 달했다. 하지만 카이사리아는 물이 부족했다. 식수공급을 위해 9km에 달하는 도수교(導水橋)를 만들어 북쪽 산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다. 도수교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4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