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비유 (10) 매정한 종의 비유
용서받았지만,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
마태 18,23-35
마태오 복음서 18장의 내용은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들을 통해서, 교회 안의 작은 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고(18,10), 죄짓게 하지도 말며(18,6-9), 죄를 지은 형제가 있으면 교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18,15-18)을 강조한다. 또한 죄를 지을 경우에도 몇 번이고 용서해야 한다(18,21-22)는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고 계시기에 우리 자신도 그러한 용서의 삶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음을 알려 준다.
매정한 종의 비유 바로 앞부분(18,21-22)에서도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되며, 비유의 내용 안에서도 여러 번 강조된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단지 일흔일곱 번이라는 숫자의 한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을 뜻하는 일곱이라는 숫자의 반복을 통해 회개하기만 하면 끝없이 용서하라는 답변으로 이해돼야 한다.
무한한 자비와 용서
용서와 탕감은 그리스어로 같은 동사에서 기원하기에, 빚의 탕감은 죄의 용서에 관한 관점 안에서 살펴봐야 한다. 비유 내용을 살펴보면,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 온다.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그렇다면 만 탈렌트는 대략 어느 정도 되는 금액이었을까?
2014년의 최저임금 시급을 일일 8시간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하루의 임금은 4만 1680원 정도다. 이를 데나리온에 적용해 보면 한 탈렌트는 약 2억 5천만 원 정도, 만 탈렌트는 2조 5천억 원 정도가 된다.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당대 유다 지역 국가의 총수입이 1000탈렌트도 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으니,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이 종을 주변 강대국 왕실의 신임을 받는 고위직 신하로 생각했을 것이고, 유다에서는 빚을 갚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파는 것 역시 금지된 것이었기에 비유의 배경을 이방 국가로 이해했을 것이다.
임금의 빚 독촉에 이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 갚겠다고 장담하며 참아달라고 청원한다. 실현 불가능한 장담을 하는 종을 바라보며 가엾은 마음이 든 왕은 오히려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준다. 종의 무리한 간청을 뛰어넘는 왕의 무한한 자비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극적 반전이 일어난다. 백 데나리온, 약 삼 개월 정도의 임금을 빚진 동료를 만난 이 종은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호통을 치며,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다른 동료들은 이 일을 임금에게 고하고, 이 종은 다시금 자신의 빚을 다 갚게 넘겨지게 된다. 이러한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며 비유를 마무리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 마태오의 주된 관심은 용서에 있다. 비유 자체에 용서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빚과 탕감이라는 비유 주제는 모두 죄와 용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서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만 탈렌트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탕감해 준 임금처럼, 하느님께서 먼저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기에 우리 역시도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알려준다.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몰랐기에 매정한 종은 단죄를 받는다. 이는 단순히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용서를 체험하고 감사하며 그 용서를 살아가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윤리 도덕적 강령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음에도 그 모든 우리의 잘못을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용서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데에 있다. 분명 큰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이들은 다른 형제들의 잘못을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랑이 가능할 수 없는 용서를 실현할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 서로를 용서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주며 이끌어주는 곳, 바로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사실을 믿지만, 용서 너머의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잊은 채 우리 자신을 아프게 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기에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는 데에 절대로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에 자주 지치곤 합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무한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의 힘 안에서, 우리 자신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복음의 묵상이 됐으면 좋겠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27일, 최광희 신부(가톨릭 청년성서모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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