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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전쟁하시는 하느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05 조회수2,871 추천수1

그레고리아의 ‘하느님, 질문 있어요!’ (2) 전쟁하시는 하느님

 

 

<십계>라는 영화를 본 건 아마 40년쯤 전, 내가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모세 역의 찰톤 헤스톤, 람세스 역의 율 브린너 등 이미 고인이 된 주인공 배우들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꿈속의 왕자들로 각인되어 있을 만큼 인상적인 영화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가장 아름다운 왕비였다는 네페르타리 역의 배우는, 그 영화에서의 역할 때문인지, 썩 매력적인 인물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만큼이나 영화의 장면들도 인상적이었다.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장면과 홍해(갈대바다)를 건널 때 바닷물이 양쪽으로 쫙 갈리며 그 양쪽 물 벽 사이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는 장면 등에서 찬탄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나도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인지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의 고집으로 인해 그렇게 많은 재앙들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의구심이 일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한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특히 파라오의 추격 명령에 따라 멋모르고 그 길로 들어섰다가 말과 함께 수장된 이집트 병사들을 볼 땐 더욱 그러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렇게 편드시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왜 그토록 모질게 대하시는지, 고집 센 파라오만 벌주면 될 텐데, 이집트 사람들까지 왜 그렇게 죽이셨는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이 그렇게 편협하신 분이신지, 이런 분을 섬겨도 될는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영화의 근간이 되는 성경구절들 중 가장 오래된 구절은 탈출기 15장의 ‘미르얌의 노래’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탈출 15,21)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신 하느님, 오싹하고 무섭다. 이 오싹한 느낌은, 최근 우리 민족 전체의 마음을 멍들게 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말한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설교에서도 들었다.

 

“한 제보자에 따르면 김 목사는 지난 5월 11일 주일예배에서 <믿음의 3요소>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던 중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세월호를-기자 주)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오마이 뉴스> 2014.5.28.)

 

이 설교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이 일부러 배를 침몰시켜 어린 학생들을 희생시키셨다는 것이다. 참 황당하고 또 당혹스럽다.

 

탈출기 15장의 미르얌의 노래처럼 구약성경에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사(戰士)로서의 하느님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이런 전사로서의 하느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신명기 20장 16-18절과 같은 내용을 들 수 있다. 이는 헤렘(전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저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히타이트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모조리 전멸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하는 온갖 역겨운 짓을 너희도 하라고 가르쳐서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니. 이웃 민족을 모조리 전멸시키라니, 정말 성경 말씀 맞아?!라는 생각이 든다.

 

이 헤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2세기 중엽의 그리스도교 이단으로 알려진 마르치온과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마르치온은, 구약의 하느님은 보복하는 잔인한 하느님인 반면 신약의 하느님은 자애로운 사랑의 하느님이라며, 구약성경은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이슬람의 지하드와 같은 뜻의 ‘성전(聖戰)’이라는 표현은 없다. 대신 ‘야훼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야훼 하느님이 전사로서 직접 싸우시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 해석된 역사임을 이해해야 위의 목사나 마르치온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전해 주는 사건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후대에 글로 기록되었다. 게다가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방대한 분량의 책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구약성경이 1차적으로 집대성된 시기는 바빌론 유배 시대다. 유배지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패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자기네 역사를 재정리했다. 그중 가장 많은 작업을 한 이들이 신명기계 역사가다.

 

야훼의 전쟁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원수에 대한 전멸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전멸 요구는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사상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말과 마차로 표상되는, 비신앙적이며 힘의 논리만을 따르는, 가나안의 바알주의와 타협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사실 학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헤렘(전멸)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바알주의에 물들게 되었고, 자신들의 순수성을 잃고 패망하여 바빌론에 유배되었다는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이런 내용들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훼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한 꺼풀 벗겨서 파악해야 한다. 야훼의 전쟁은 무엇보다도 약자를 보호하는 방어전이었다. 야훼의 전쟁은 긴박하고도 희망 없는 위기의 상황 속에 있는 약자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임과 동시에, 그 부르짖는 약자를 말과 마차(기병)로 상징되는 강대한 힘(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이다.

 

또한 야훼의 전쟁은 인간의 전쟁과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예컨대, 야훼 하느님의 군대는 그 군대의 수를 적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줄인다거나(판관 6,35), 또는 이스라엘은 단지 ‘주님을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판관 7,18)라고 부르짖는 일만을 할 뿐 실전 행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거나(탈출 14,14),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력히 비난하고 거부한다(시편 68,31). 홍해(갈대 바다) 앞에서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르짖었을 때, 모세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단지,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탈출 14,14)라는 말씀뿐이었던 것도 그 예 중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야훼의 전쟁은 일반적인 의미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는 반전(反戰) 사상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 제44호(2014년 여름), 송향숙 그레고리아(가톨릭출판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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