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비유 (20)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비유 속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독일 뉘렌베르크 박물관 소장.
루카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예화에 속하며, 다른 대부분의 비유처럼 예수의 여행기사(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9,51─19,27) 안에 위치한다.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16,18)과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17,1-3) 사이에서 연속성 없이, 또 서론 없이 나온다. 따라서 이 비유의 청중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내용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상기시킨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부자와 거지인데, 거지의 이름은 라자로다. 이렇게 비유 안에서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가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이 비유의 거지와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반면에 부자는 익명인데, 필사본에 따라 네우에스, 피니스 혹은 디베스라는 이름이 보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증언은 아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특별히 악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으며, 라자로도 특별히 선하거나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두 계층으로 나뉘던 사회의 대표 자격으로 보인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데, 이는 왕의 신분이나 그에 해당하는 특권 그리고 부에 대한 상징이다. 라자로가 그 집 대문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담과 대문으로 둘러싸인 집에 살면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생활한 것 같다.
반면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다. “누워 있다”는 동사의 시제로 보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다. 또한 배고픔을 겪으며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바란다. 이는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사용하고는 냅킨 대신 빵을 사용했던 관습을 반영하는데, 그것으로도 배를 채우지 못한다. 또한 들개들은 라자로의 종기를 핥으며 그의 죽음을 기다린다.
부자와 라자로가 죽고 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역전된다. 라자로는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이는 에녹이나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아브라함의 품은 죽음 이후의 은총 상태, 절대적 휴식의 장소이다. 반면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저승을 뜻하는 ‘하데스’는 일반적으로 죽은 이들의 나라로서 최후심판 이전에 잠시 머무는 장소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영원한 거처로 벌 받는 장소, 즉 지옥에 해당한다.
부자는 고통 중에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는데, “아브라함 할아버지”라는 표현은 “아브라함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부자는 첫 번째로 자신이 당하는 목마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자로를 보내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아브라함은 그에게 이미 좋은 것을 다 누렸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구렁이 놓여 있어서 왕래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구렁이 놓여 있다는 수동태 표현은 그 구렁이 하느님께서 설치하신 것을 의미하며, 부자가 살아생전에 담과 대문으로 바깥세계와 단절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부자의 두 번째 요청은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 경고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 즉 성경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이야기하며 역시 거절한다.
세 번째 요청은 두 번째 요청의 반박이면서 반복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야 회개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한다. 이 마지막 내용은 우화적 요소로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 그리스도교 용어에서 영감을 받았으리라고 본다. 즉 모세와 엘리야로부터 예수가 메시아라는 신앙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그분이 부활했다는 선포를 통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
이 비유의 의문점이면서 핵심은 왜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을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 부자는 살아생전에 좋은 것들을 받았기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간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부자였기 때문이다.
부자의 잘못은 담과 대문으로 대표되는 바깥세계에 대한 단절과 무관심이라고 보아야 한다. 부자가 라자로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생전에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라자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지만 그 이름의 히브리식 표현은 “엘르아잘”로서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으로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었던 “주님의 가난한 이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무관심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와 가난한 이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하리라는 진복선언의 말씀을 보여준다. 또한 개인적인 자선을 촉구할 뿐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적인 제도와 장애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일깨운다.
[평화신문, 2014년 10월 19일, 이성근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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