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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04 조회수4,105 추천수1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1)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당파와 자주 부딪치셨다. 대표 주자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였다. 그밖에도 에세네파와 헤롯파, 열혈당이라 번역된 젤롯(Zealot)이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제사장 조직으로 정치화되어 있었고 바리사이파는 율법에 매진하는 이들이었다. 헤롯파는 헤롯 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고 젤롯은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단체였다. 예수님 활동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사두가이파는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 차독(Zadok)의 후예로 자처했다. 그는 여부스족 사제였지만 다윗에게 발탁되어 이스라엘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차독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 다윗 자리를 노리는 왕자의 난에서 차독은 솔로몬을 지지한다. 예언자 나탄과 솔로몬의 생모 밧 세바와 손잡았던 것이다. 마침내 대제사장 에브야타르 물리치고 새로운 대제사장이 된다(1열왕 2,35).

 

솔로몬 치세에서 차독 가문은 제관 계급의 요직을 독식했고 직계가 아니면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후손들은 실권을 장악했고 수 세기 동안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 있었다. 이들이 사두가이파의 원형이다.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이 유다 독립을 쟁취하자 제관 계급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성전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의 출현이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였고 예언서와 지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후세계와 영적 존재도 부정했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거부했다. 종교적 실세였기에 유다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을 좌우했고 헤롯 왕권과도 거리를 두며 기득권을 지켰다. 로마인과는 쉽게 적응해 좋은 관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백성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오히려 회당을 통해 민중을 장악하고 있던 바리사이파가 더 인기 있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사두가이파는 힘을 잃는다. 활동 무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는 이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관해 질문하는 장면이 있다. 일곱 형제와 혼인한 여인이 있었는데 죽은 뒤 부활한다면 누구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대를 이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님 답변은 간단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14년 11월 2일 연중 제31주일(위령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2)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은 희랍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다인은 마카베오 형제를 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BC 164년 성공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 마카베오기다.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제관 계급이 정치에 뛰어든다. 사두가이파 등장이다. 바리사이파 역시 전면에 나선다. 두 파는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 없었다. 구약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는 모세오경 즉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예언서와 교훈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고 했다. 바리사이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서로 되었건 구전으로 전해졌건 모든 계율에 충실해지려 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문서와 구전으로 양분되어 전해진다며 사두가이파와 맞섰다.

 

바리사이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 구분하다)가 어원이다. 자신들을 페루심(Perushim)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분리된 자’란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분리되길 원했을까?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이다. 레위기 11장부터 15장 사이에 등장하는 온갖 부정함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훼의 축복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번째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과 희랍문화에 젖어 있는 민중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유다인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 흩어진 이들을 붙잡고 교육한 이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유다교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그들은 성전 대신 회당(Synagogae)을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으며 현실의 상황에 맞춰 율법적응에도 융통성을 부여했다. 해외 유다인(디아스포라)을 존속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리사이파가 장악하고 있던 회당과 학교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자주 논쟁하셨다. 율법에 대한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에게 율법준수는 신앙의 목적이었다. 야훼를 사랑하는 길이었다. 철저하게 지킬수록 철저하게 섬기는 것으로 알았다. 이민족의 지배는 율법을 어긴 보속이라 생각했다. 율법준수만이 다시 야훼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어울리며 마귀 들린 사람과도 접촉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율법준수의 방해자로 비쳤던 것이다.

 

바리사이파의 특색은 엄격한 율법준수와 함께 중산층을 포섭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유다교의 주류를 이룰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파였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뒤 바뀐 분이다. 사도는 서간에서 율법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2014년 11월 9일 연중 제32주일(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3)

 

 

헤로데당은 글자 그대로 임금 헤로데를 추종하던 세력이다. 바리사이파와 함께 예수님을 반대했다(마르 3,6).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질문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옭아매려던 물음이다. 유명 사건이었기에 공관 복음에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루카복음은 헤로데당이란 말을 생략했다(루카 20,21). 헤로데를 지지할 때는 언제나 바리사이파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이들은 헤로데 왕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재건을 원했다. 유다민족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헤로데 통치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겼던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 당시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소요를 모조리 진압하여 로마가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헤로데당원은 사두가이파와 함께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단이었다. 사두가이파는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고 헤로데당은 로마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두 당파는 친로마 정책을 펴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세력은 팔레스티나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민중이 자극받고 봉기할까 봐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지만(마르 8,15)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다. 당신을 죽이려는 헤로데의 정보를 알았을 때도 그를 여우라 하며(루카 13,32) 개의치 않으셨다. 헤로데당의 의중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헤로데 왕조의 출발은 헤로데 대왕이다. 기원전 37년부터 4년까지 33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이다. 실권은 로마에 있고 임명된 왕이었지만 철저한 충성으로 확실한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과잉충성은 유다인의 적개심을 야기 시켰고 견제를 위해 정치적으로 동원한 이들이 헤로데당원이었다.

 

헤로데는 유다인의 여론을 의식하며 조심스러운 정치를 폈다. 소요사태로 로마가 개입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헤로데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례자 요한의 제거도 예수님의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헤로데당은 하수인이었다. 말년의 헤로데는 어둡고 잔인했다. 측근을 의심해 제거했고 아내와 아들들을 살해했다. 죽기 직전 유언을 통해 왕국을 남은 세 아들에게 분배했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아르켈라오스에게(마태 2,22) 갈릴래아는 안티파스에게 맡겼다. 헤로데는 기원전 4년 봄에 죽었다. 70세였다. [2014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4)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소개되어 있다. 시몬 앞에는 언제나 열혈당원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한때 맹렬한 활동가였다는 증거다. 열혈당은 젤롯(Zealot)의 번역이다. 어원은 희랍어 젤로타이(zelotai)로 종교적 열성을 뜻하는 말이다. 열혈(熱血)은 뜨거운 피로 역시 격렬한 열정을 일컫는다. 이들은 선민사상을 내세워 이방민족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폭력의 사용도 묵인했다.

 

열혈당은 66년 갈릴래아 소농(小農)을 중심으로 봉기한다. 1차 독립운동이다. 70년까지 5년간 싸우지만 패배로 막을 내린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초토화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열혈당은 마사다로 피신해 항전을 계속했다. 요새에는 헤로데가 숨겨둔 무기들이 많았다. 3년을 버티지만 로마도 끈질겼다. 그들은 마사다 주위에 흙을 쌓아 요새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었다. 길이 197m 높이 55m의 경사진 도로였다. 젤롯의 지도자 엘리아자르는 가장들을 설득해 가족을 살해하게 했다. 그리고 남은 가장들도 제비뽑기로 살해되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요새에 불을 지른 뒤 자결했다. 죽은 사람은 960명이었다. 투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로마의 역사가로 변신한 요세푸스의 증언이다.

 

젤롯당은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했으며 그들의 글자까지 외면했다. 로마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는 유다인을 경멸했고 때로는 테러와 암살을 시도했다. 이들 극우파를 시카리(Sicarii)라 했다. 독립을 위해선 살인도 불사한다며 단검을 품고 다녔던 행동대원이다. 자객을 뜻하는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가 어원이다.

 

로마통치를 반대했던 이론은 단순했다. 이스라엘은 다윗 후손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유다인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항전은 신앙행위였고 66년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의 실세는 이들이었다. 로마당국은 열혈당원을 체포하면 공개적으로 십자가형에 처했다. 예수님의 양옆 십자가에서 처형된 강도 두 사람도 열혈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코 복음 15장 27절에 나오는 강도는 희랍어 레스타이(lestai)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로마인이 열혈당원을 가리킬 때 사용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스승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도 시카리 유다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보고 있다. 열혈당의 극우분자였던 시카리 출신이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2014년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유다교 당파 (5)

 

 

에세네파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은 없다. 전해진 기록도 중요한 대목에선 일치하지 않는다. 여러 분파가 있었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다음은 알려진 내용이다. 철저하게 공동생활했으며 혼인은 멀리했다. 재산은 공유했고 일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받았다. 회원은 사천 명을 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 이상으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았다. 영원불멸과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부정했다.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성전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식일엔 기도와 율법 공부로 하루를 보냈다. 맹세는 삼가 하였고 한번 맹세하면 철회할 수 없었다. 입회는 3년 수련을 거친 뒤 허락되었다. 1년은 규칙 적응시기였고 2년부터 금욕적인 수련이 가해졌다. 식사는 따로 했으며 입회 과정이 통과되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공동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1947년 예리코 남쪽 쿰란 지역에서 사해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곳에 있던 공동체가 에세네파였다고 대부분 이야기하고 있다.

 

에세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선 일치된 견해가 없다. 거룩하다 경건하다는 의미와 연관 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다. 훗날의 쿰란 문서에도 에세네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기원전 150년경 나타나 1세기 말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모세였다. 따라서 그의 생존시기였던 광야생활을 모델로 한 것이 쿰란 공동체였다고 한다.

 

에세네파는 임박한 종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재산 공유가 가능했고 독신생활을 당연시했다. 정결 예식을 중시해 자주 씻었고 참회 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오래된 회원일수록 흰옷을 입었고 성경 필사에 헌신했다.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동트기 전 일어나 지정된 일터로 갔고 11시까지 일했다. 이후 몸을 씻었다. 그리고는 흰옷을 입고 공동식사를 위한 방으로 갔다. 식사가 끝나면 평복을 갈아입고 저녁때까지 일했다. 저녁 식사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종말 때에 빛의 아들이 어둠의 아들을 물리치고 하느님 나라를 세운다고 믿었다. 그러나 종말은 오지 않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인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 사해 인근 동굴에 보관된 문서들은 이때 감추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이들의 공동체도 급속히 와해되었다. [2014년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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