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28) 페르게
소아시아 전교 여행의 시작지
소아시아 남부의 고대 도시 중 하나인 페르게는 팜필리아 지방의 한 도시로 기원전 12~13세기쯤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게는 트로이 전쟁 이후에 발전했다. 리디아 왕국에 이어 페르시아의 점령하에 들어갔던 페르게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해방되고 최고 번영기를 누린 것은 로마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페르게에서 볼 수 있는 유적 대부분은 역시 로마 때의 것이다. 현재도 유적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페르게는 해안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팜필리아 평원과 서동부의 교통 요충지였다. 현재 페르게에서 발굴된 유적에는 성채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낮은 성읍과 외딴곳에 세워진 기념비 등이 있다. 성벽 안에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욕탕 같은 공공건물이 몇 개 남아 있다. 남문과 서문 밖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극장과 경기장은 성벽으로 쌓인 낮은 성읍 밖에 남아 있다.
바오로 사도, 1차 전교여행 때 두 차례 통과
이곳 페르게는 바오로 사도가 소아시아 전교 여행을 시작했던 중요한 곳이며 그와 연관이 깊은 도시다(사도13,13:14,24-25). 바오로 사도는 1차 전교 여행 때(45~48년쯤) 두 번에 걸쳐 이곳을 통과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에 도착해 곧바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사도 13,14).
이곳 페르게에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넘어가는 곳은 어느 지역보다 위험한 곳이다. 바오로 사도가 강도의 위험을 당했다고 하는 지역이 이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전교 여행에 동행하던 마르코 요한은 너무 힘든 나머지 이곳에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바오로와 바르나바, 각자의 길로
이 일은 2차 전교 여행 때 두 사람이 헤어진 원인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중에 세운 교회들에서 문제가 대두하자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보자고 사목방문을 권한다. “며칠 뒤에 바오로가 바르나바에게, ‘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15,36).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신앙에 따라 사는지를 살펴보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불리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 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마르코가 팜필리아 페르게에서 사도들과 협력하기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로 가서 그들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협조자로 실라스를 선택하여 사도들과 함께 머물며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했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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