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쿰란 공동체 쿰란 공동체는 1947년 사해문서가 발견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주거지는 사해 북쪽 해안가였다. 남과 북 그리고 서쪽은 계곡이 감쌌고 사해가 보이는 동쪽만 열려있는 지형이다. 서쪽 계곡은 가파른 절벽인데 동굴이 많다. 두루마리가 발견된 곳이다. 쿰란이란 지명은 이곳을 지나는 쿰란 와디에서 따온 말이다. 와디는 사막의 강으로 평소 말라 있지만 비가 오면 강이 되는 곳이다. 예리코 남쪽 10km 지점이며 사해 서북쪽 1km 지점이다. 아랍인은 키르베트 쿰란이라 부른다. 쿰란 폐허란 뜻이다. 이들을 에세네파로 확정 지은 사람은 도미니코 수도회 드 보(de Vaux) 신부다. 예루살렘 성서대학(Ecole Biblique) 교수로 쿰란 발굴을 이끌었던 분이다. 그들은 완벽하게 속세를 떠난 삶을 추구했다. 재산은 공유했고 금욕 생활을 지향하며 대부분 혼인하지 않았다. 의복과 신발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했으며 의로운 삶에 대한 보상을 믿었다. 함께 노동하고 함께 식사했으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았다. 뿌리는 하시드인들이다(1마카 2,42). 하시드는 히브리어로 경건함을 뜻한다. 현대에도 이들은 까만 양복에 둥근 모자를 쓰고 턱수염 모습으로 공적 장소에 나타나곤 한다. 하시드인은 바빌론 포로생활 이후 등장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왜 이방인 식민지가 되어야 하는지 고뇌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속으로 받아들였다. 율법을 어기며 살았기에 벌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율에 충실한 민족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축복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기원전 2세기 유다인은 희랍 지배를 받았다. 박해가 심해지자 하시드인들이 눈에 띄게 반발했다. 저항세력을 형성했고 마카베오 가문을 도와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독립 후엔 결별한다. 대제사장 임명 때문이었다. 그는 제관 계급 으뜸이기에 마카베오 정권에겐 중요했다. 당연히 정치적 인물이 선택된다. 그런데 제관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임명 자체가 율법 위반이었던 것이다. 현직 대제사장은 스스로 물러나 광야에서 때를 기다린다. 많은 하시드인들이 그를 지지하며 따랐다. 쿰란 공동체 출발로 보고 있다. 정통 대사제는 ‘정의의 스승’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4년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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