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갈릴레이는 왜 종교재판을 받아야만 했나 어느 날 기차 안에서 만난 어떤 분이 저에게, 어렸을 때에는 성당에 다녔는데 과학을 공부하면서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일이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대화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누군가 그분에게 성경을 읽는 법을 제대로 알려 드리기만 했어도 신앙을 버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기와 자연 과학, 창세기와 역사의 문제, 그리고 진리의 문제.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저에게 창세기의 진술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사실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창세기 1장과 2장 중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되묻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들을 먼저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다고 나오는데 2장에서는 먼저 인간을 만드셨고 그 후에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성경 본문 안에서 이미 창세기 저자의 의도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 1-11장의 태고사뿐만 아니라 12-50장의 성조사도,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 고고학이 처음 생겼을 때에 고고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확인해 줄 증거를 찾고 싶어 했습니다. 좋은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탈출기와 여호수아기의 내용은,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자연 과학과의 문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갈릴레이 사건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태양을 멈추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여호 10,12-14 참조). 움직이고 있어야 멈출 수가 있으니까, 태양이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이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역사학이나 자연 과학의 지식을 주장하면서 그러니까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역사학이나 자연 과학에서 말하는 것이 틀렸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두 가지 태도가 모두 잘못 되었습니다. 잘못된 이유는 똑같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귤은 왜 주황색이냐고 식구들에게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가지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대답도 있었고, 귤은 먹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먹힐 수 있도록 예쁜 색을 띠게 된다는 대답도 있었습니다. 귤의 색깔에 대한 설명은 이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는 방법 역시 그러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6일간에 걸쳐 만드셨다고 말할 때에는, 이 세상이 존재하던 첫 6일 동안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니고 세상이 생겨난 과정을 자연 과학적으로 기술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이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여 존재한다는 것, 다음으로는 그래서 세상의 만물은 본래 선하고 귀중하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돌볼 책임을 맡고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다음으로 11장까지 이어지는 태고사 역시 이 세상에 대해 설명해 주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하느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세상 안에 악이 공존하고 있고,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이 악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창세 12-50장의 성조사는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갖게 된 신앙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점차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삶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했으며, 이를 자녀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기록으로 전수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말로 전해진 것이었으며, 완성된 형태로 고정되기까지 계속해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때로 후손들은 조상들의 역사 안에서 지금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같은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 같은 이들의 역사에는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후손의 수는 60만 명이 아니었고, 예리코를 함락시킨 것은 여호수아 시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성경이 거짓되다고 여기고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해야 할 일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들이 60만 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함락시켰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저자들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오류나 부정확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이 경우 좀더 자세히 조사해보면 저자의 이런 약점은 당시의 사회생활에서 늘 사용하던, 그리고 실제로 통상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버린 고대인의 일반적 표현 양식과 그들 고유의 설화 구사법에 기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성령의 영감」, 38항). [평화신문, 2015년 1월 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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