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7)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7,5)
탈출기를 읽으면 주님이 보인다
- 모세와 떨기나무, 비잔틴 모자이크
탈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단어를 보면서 마음 안에 간절한 염원을 느낄까요? 탈출기라는 책은 그 염원에 응답합니다.
탈출기는 출애굽기라고 하다가 성경 번역을 새로 하면서 제목도 다시 붙게 된 책입니다. 그래서 전에 낱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던 탈출기에는 어떤 의미로 이 책을 ‘탈출기’라고 부르기로 했는지 설명이 있었습니다. 아주 짧게 말하면, ‘출애굽’은 한 번 있었던 사건이지만 ‘탈출’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은 아마도 기원전 13세기,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온 사건입니다. 그러나 탈출은 속박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불의로부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한 번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반복되어 왔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탈출기에 기록된 이 과거의 사건은 그러한 탈출들의 원형이 됩니다.
이집트 탈출이 과연 얼마나 규모가 큰 사건이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60만 명이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불가능합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 가운데 어느 특정 집단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체험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얼굴을 보여 주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기에 60만이, 우리 모두가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말하게 됩니다.
탈출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8장은 이집트 탈출에 관한 설화를 들려주고, 19-40장은 주로 법률 부분입니다. 처음에 이집트 땅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은 열 가지 재앙을 거친 다음 14-15장에서 갈대 바다를 건너고 16-18장에서 광야를 지나 시나이 산에 도착합니다. 19-40장에서는 움직임이 없이 시나이 산에 머뭅니다. 레위기 전부와 민수기 10장까지도 시나이 산을 배경으로 할 것입니다.
탈출기의 전반부, 1-18장에 기록된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도, 이스라엘도, 파라오도 주님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탈출 3,13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을 때 파라오는 주님이 누구이기에 나에게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명령하느냐고 되묻습니다(탈출 5,2 참조). 아직 아무도 그분을 모릅니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대답하십니다. 뜻을 알기 어려운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대략 세 가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나는 그냥 나이지 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름을 붙인다면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안에 하느님이 갇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나’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있는’ 분,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을 거치면서 그러한 의미가 더욱 부각되었고 이는 철학의 하느님 이해와도 깊이 연관되었습니다.
셋째는, 내가 누구인지는 이제부터 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보게 될 나, 그것이 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 3,12). “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7,5).
세 번째 의미를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끌어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탈출 3장에서 아직 이스라엘은 그 사건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천 마디 말로 설명을 해도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파라오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라오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열 가지 재앙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는 아홉 가지 재앙을 거치고도 하느님을 알지 못했으니 그가 하느님을 알게 한 것은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가 죽었던 열 번째 재앙에서였습니다(탈출 11장).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갈대바다를 건널 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가로막고 있던 죽음의 순간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시는 구원을 보았습니다(탈출 14,13).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표지가 15장에 나오는 바다의 노래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이분은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찬미하리라”(탈출 15,2).
여기에 이르면 파라오도 하느님을 알고 이스라엘도 하느님을 압니다. 더 이상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묻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분으로 일컬어지실 것입니다. 탈출은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억압과 불의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을 때,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모습이 아닐 때,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억눌려 일그러져 있을 때 하느님은 다시 개입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말해 주는 책이 탈출기입니다.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24).
[평화신문, 2015년 1월 1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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