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기도] 기도하시는 예수님
공관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기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즉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기도를 많이 하셨다는 것을 복음서들이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요한 17장)는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호에서는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 그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루카 복음서에 가장 많이 제시되어 있지만, 이미 마르코 복음서 안에 그 뚜렷한 윤곽이 드러나 있다.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고 언급되는 곳은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마르 1,35; 6,46 : 많은 활동 후에 ‘홀로’ 하느님 아버지와 마주하시는 기도.
2) 마르 14,32-42 : 겟세마니에서 하신 기도.
3) 마르 6,41; 8,6-7; 14,22-23 : 식사 전 기도. 마르 14,22-23의 기도는 최후만찬 때 성찬례를 제정하시는 맥락에 나오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만, 식사 전에 드리는 기도라는 점에서는 마르 6,41; 8,6-7에 나오는 기도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4) 마르 15,34 : 골고타 십자가 위에서 하신 기도.
위에 제시한 것 말고도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경건한 유다인들이라면 으레 하였을 다른 기도들도 많이 하셨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셔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아) 기도”1),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던 여러 기도들2), 여러 순례 축제 때(예컨대,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다인들이 바치던 기도들(특히 시편기도들)도 함께 바치셨을 것이다. 그러니, 복음사가들이 전해주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기도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제한된 지면 때문에, 위에 제시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마르코 복음서의 단락들 가운데 첫째 부분, 곧 마르 1,35에 관해서만 살펴보겠다.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예수님’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는 데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차원인 ‘자비의 활동’과 ‘기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맥락 :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위의 말씀은 이른바 ‘카파르나움에서의 바쁜 하루’(마르 1,21-38)라는 맥락에 나온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며 우선 네 제자를 부르신(1,16-20) 다음, 그들을 대동하고 안식일 낮에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다(1,21-28). 회당에서 나오신 다음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다(1,29-31).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곧, 안식일이 끝나자3))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시몬의 집에 머물던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문 앞에서 고쳐주신다(1,32-34). 아마 예수님의 이 병자치유 활동은 밤늦게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바쁘게 지낸 하루에 대한 묘사가 있은 다음에,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라는 말씀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일어나 나가신 때가 아주 어두운 시간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 시간이 길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쁘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 1,35의 말씀의 앞부분에서뿐 아니라, 다음 부분(1,36-39)에서도 묘사되어 있다“(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라는 1,39의 요약문 참조.).
마르 1,29-39의 맥락에서 본 ‘외딴곳으로 나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마르 1,35) : 이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삶에 근본적으로 두 차원, 곧 ‘자비의 활동’과 ‘기도’의 차원이 있다는 점과 이 두 차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시작 부분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분께서 하시는 ‘자비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갖가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의 자비는 모든 고통에 열려있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는 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생활 중에는 이런 ‘자비의 활동’ 외에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모습’이다(1,35). (하느님)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와 일치해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이 열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비를 베푸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예컨대 시몬의 일행이 찾아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라고 말씀하신다.
카파르나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찾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이런 상황을 훌훌 털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자 그곳을 떠나신다.
마르코 복음서의 맥락에서 예수님의 이런 단호한 결단과 식별은 ‘오랜 기도’(“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하신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마르 1,35에 따르면, 기도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푸는 활동의 원동력이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사랑의 샘이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셨다고 전해주는 다른 구절들 : 마르 1,35에서처럼 외딴곳으로 떠나 ‘홀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들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다. 자주 언급된다.4) 마르 6,46의 다음 말씀이 그 한 예이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이 말씀은 ‘호수 위를 걸으신 이야기’(마르 6,45-52)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데, 바로 그 앞에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이야기’(마르 6,30-44)가 있었다. 1,35에서처럼 여기서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신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홀로’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지시하시고, 당신 홀로 산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예수님의 기도는 ‘밤늦은 시간에’ 하는 기도이다(6,48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사가들이 “홀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여 전하는 의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데 있지, 기도는 반드시 ‘홀로’해야 한다고 가르치려는데 있지 않다. 예컨대 마태 18,19-20의 말씀은, 제자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그 효과를 강조한다.
복음서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기도의 장소가 골방이든(마태 6,6 참조), 회당이든, 성전이든, 산이든, 또 기도를 홀로 하건, 함께 하건, 기도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가식적이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마음을 온전히(오롯하게)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5) 바로 이 점을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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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라, 이스라엘아”(히브리어로 ‘셔마 이스라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 6,4-5의 말씀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에 기도로 바치던 신앙고백적 계명이며 동시에 기도였다.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최고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즉각 대답하셨다(마르 12,29-31).
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거나 치유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온다(예를 들면, 마르 1,21-28; 3,1-6; 마르 6,1-6; 루카 4,16-30). 이런 회당 방문 때,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기도도 함께 바치셨을 것이다.
3) 유다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해가 떨어지면서부터였다.
4) 마태 14,23(마르 6,46의 병행구절); 루카 5,16; 9,18(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에); 9,28-29(거룩한 변모의 장면). 또한 마르 1,12-13(“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유혹을 받으신”이야기)와 마태 6,6도 참조.
5) 참조 :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59항에 인용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말씀).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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