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1] 천지창조와 성전
천사와 씨름 끝에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난 ‘야곱’은(창세 32,29) 열두 아들들을 두었다. 그 아들들이 이집트 탈출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불어난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지파에 상응하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공생애를 함께하게 하셨다.
성경에서 ‘열둘’은 참 의미 있는 숫자다. 열두 달로 구성된 한 해 동안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주제들을 선별하고, 고대인들이 바라본 관점과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주제는 구약의 첫 장을 여는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창세기뿐 아니라 여러 예언서와 시편 등의 주제가 되었으며, ‘성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글에서는 시편 104,3과 창세 1장을 화두로 삼아, ‘천지창조’와 ‘성전’의 의미, 그 관계성에 대해 밝혀보고자 한다.
“물 위에 당신의 거처를 세우시는 분”(시편 104,3)
저마다의 고뇌와 아픔, 신앙을 노래하는 시편은 애잔하고도 아름다운 찬송, 또 힘찬 고백들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 또한 많이 보여준다. 그 가운데 ‘물 위에 하느님의 거처를 세우셨다.’는 시편 104,3은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한 찬송은 아닐 것이다. 이 안에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그리고 성전을 삼라만상의 중심으로 고백했던 고대인들의 찬양이 담겨 있지만, 그것을 단번에 알아보기는 어렵다.
반면, 시편 저자는 78,69에서 “당신 성전을 드높은 하늘처럼, 영원히 굳게 세우신 땅처럼 지으셨다.”는 좀 더 보편적인 찬송으로, ‘온 세상의 중심이 되는 성전’을 찬양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에게 ‘성전’이란, 혼돈의 세력을 정복하고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상징적으로 ‘안식’을 취하시는 곳이었다(시편 132,8.14 참조 : “주님, 일어나시어 당신의 안식처로 드소서.” “이는 길이길이 내 안식처, 내가 이를 원하였으니 나 여기에서 지내리라.”).
그러나 하느님의 안식은 인간적인 피로회복이 아니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순조롭게 유지되고 있으므로, 당신께서 하실 일 없이 평화롭게 쉴 수 있음을 뜻한다. 한편, ‘혼돈의 세력’이 창조질서를 해치려 할 때마다, 하느님이 그 세력을 제압하고 다스리신다고 믿었다. ‘혼돈의 세력’은 흔히 ‘물’과 ‘어둠’으로 상징되었는데, 이 관점은 창세기 1장에서도 확인된다.
창조의 시작
한처음에 땅은 꼴을 갖추지 못했으며, ‘어둠’이 ‘심연’을 덮고 ‘주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참조). 이 구절은 주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의 모습을 묘사한다. 곧, 태초의 세상은 ‘물’과 ‘어둠’에 싸여있었다.
하느님은 첫 창조활동으로 ‘빛’이 생겨나게 하신다(창세 1,3). ‘빛’은 ‘어둠’이라는 혼돈을 바로잡는 역할이다. 이 ‘빛’이 낮이 되고, ‘어둠’은 밤이 되었으므로(창세 1,5), 하느님은 ‘창조’를 통해 태초의 ‘혼돈’에 첫 질서를 잡으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창조경제’니, ‘창조적 사고’니 하는 표현으로 ‘창조’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창조(히브리 말로는 ‘바라’)’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특별한 작업이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이 동사를 적용할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낱말 하나에도 이렇게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혼돈의 물을 정복하시다
하느님이 ‘빛’의 창조로 ‘어둠’이라는 혼돈에게 ‘밤’의 역할을 배정하신 뒤에는, 태초의 ‘물’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셨다(창세 1,6-8). ‘어둠’과 함께 혼돈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물’은 고대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준다.
‘물’은 생명이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노아의 홍수’ 참조). 그래서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물’을 신성하게 보았으며, 창세 1,2의 ‘심연’ 또한 ‘깊은 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님의 영’이 심연의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혼돈’의 힘을 ‘누르심’, 곧 ‘제압하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물’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셨으며, 하늘은 “궁창”이라 부르셨다(창세1,8).
“궁창”은 히브리어로는 ‘라키아’인데, 이 말은 ‘단단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인들은, 하늘이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한처음의 물이 위 아래로 분리된 다음, 하늘에 저장된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궁창”이 받쳐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하늘 물이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고 보았다(시편 148,4 :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의 하늘아,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참조).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창세 7,11). 곧, 태초의 세상이 ‘물’에 덮여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하느님이 세상을 멸하실 때에는, 이 혼돈의 ‘물’이 홍수가 되어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창세 7,6-24).
물 위에 좌정하신 주님
옛사람들은 ‘물’을 창조주에 대항하는 ‘혼돈의 세력’으로 여겼으므로, 시편 93,3-4에는 “강물”들이 인격화되어, 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강물”들보다 엄위하시다. 그래서 강물들이 정해진 경계를 넘으려 해도, 창조주께서 이를 제압하실 수 있다(예레 5,22 참조).
바다나 강 인근에 살았던 주민들은 해일이나 범람하는 강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물이 육지까지 침범하여 피조물들을 해치는 현상을 창조주에 대한 ‘반란’처럼 여겼던 것이다.
하바 3,8에도 하느님이 “강”과 “바다”에 진노하신다는 표현이 나오며, 고대인들이 물을 창조질서에 해가 되는 세력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물 위에 좌정하셨다.’는 시편 104,3은, 반란의 조짐을 보이는 물을 제압하시고 그 위에 성전을 지으심으로써, 창조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창조의 완성과 안식일, 그리고 세상의 평화
한처음에 주님께서 창조하신 삼라만상은 모든 것이 완벽했기에, 태초의 혼돈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레째 되는 날 휴식을 취하신다(창세 2,4). 그러나 이것은 피곤에 지친 인간이 쉬는 것과 다른 개념이다. ‘하느님의 안식’은 ‘세상이 평화롭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이 일주일에 한 번씩 기념하도록 규정한 ‘안식일’도 근본적으로는 여기에서 유래한다(탈출 20,8-11; 신명 5,12-15). 곧, 이스라엘은 주님이 완벽하게 만드신 창조질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안식일’ 율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창조질서에 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면, 하느님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안식에서 깨어나셔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곤경에 빠졌을 때, 시편 44,24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깨어나소서, 주님, 어찌하여 주무십니까? 잠을 깨소서, 저희를 영영 버리지 마소서!” 하고 청했던 것이다. 곧,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혼돈’이 닥쳤으니, 주님께서 빨리 그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호소해야 한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고대인들은 하느님의 ‘안식’, 곧 세상의 ‘평화’를 상징하면서, 또 그것을 보장받는 의미로 성전을 지어 봉헌했다. 그래서 지상 성전은 하늘 성전의 복사판처럼 지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모세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모형대로 성막을 짓도록 지침을 받았으며(탈출 25,9), 솔로몬이 봉헌한 성전도 하늘 성전의 모형을 본뜬 것이다. 그래서 하늘 궁창에 물이 저장된 곳과 하느님의 성전이 있다고 믿은 것처럼, 솔로몬이 봉헌한 성전에도 청동 ‘바다’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다(1열왕 7,23-26). 이것은 주님께서 제압하신 태초의 ‘깊은 물’, 곧 ‘심연’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성전 안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는 십계명을 담은 계약궤를 두었으며, 계약궤 위는 ‘커룹’으로 장식했다. 커룹들은 그 위에 좌정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역할로서(1사무 4,4 참조), 주님의 하늘 왕좌를 지지하는 실제 케루빔(커룹의 복수형)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에제키엘이 1장과 10장에서 환시 가운데 목격한 ‘케루빔 수레’는, 하느님이 실제로 좌정하신 하늘 왕좌였다. 하늘에 봉헌된 주님 성전과 계약궤는 묵시 11,19에도 언급된다“(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계약궤의 행방
다만, 계약궤는 기원전 587/6년 바빌론에 의해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자취가 묘연해져,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2마카 2,5는 예레미야가 동굴 안에 숨겼다는 전승을 전하지만,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가 오면, 주님 옥좌를 상징하는 계약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예레 3,16-17). 왜냐하면, 그때는 예루살렘 전체가 “주님의 옥좌”라 불리며,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계약궤 대신, 구원받은 하느님의 도성이 주님의 현존을 영원히 상징해줄 것이다.
‘물 위에 당신의 거처를 세우셨다’
위 시편의 고백은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찬양하는 찬미가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에, 성경은 옛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 눈에 맞추어 하느님의 위업을 표현해 주었다. 이것은 바다에 왜 파도가 이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바다가 숨을 쉬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엄마의 대답과도 같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태곳적 표현을 요즘의 시각으로 이해한 다음, 우리 언어로 새롭게 바꾸어 찬미할 수 있다. 비록 세상을 보는 눈은 달랐으나, 삼라만상을 채운 피조물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손금처럼 새겨놓으신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은 지금도 같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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