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0)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민수 14,3)
믿음이 없다면 약속의 땅에 갈 수 없다
- 광야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향한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그들의 대부분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진은 시나이 광야 체험을 하는 순례객들.
‘광야에서’. 이것이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의 전부는두 명만 제외하고 모두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수기에서는 아직 시나이에 머물던 이스라엘이 준비를 갖춘 다음 광야를 거쳐 모압 평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의 불평이 반복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물이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고 외적에 맞서 싸워야 하고 앞길도 불확실하며 언제 가나안 땅에 도착할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백성은 그저 모세에게 찾아가 불평할 뿐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때로는 힘이 겨워 모세 자신도 하느님께 탄원하고,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시나이 산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시나이 산까지 광야를 거쳐 왔습니다(탈출 16-18장).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습니다. 탈출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석 달 만 시나이 산에 도착했다고 되어 말합니다(탈출 19,1). 그때에도 어려움은 적지 않았고, 그때에도 백성은 불평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의 이스라엘은 이미 탈출기의 이스라엘과 다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탈출 19-24장)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게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의 불평은 단순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는 울부짖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불신의 표지로 나타납니다. 탈출기에서와 달리 불평에 대하여 하느님의 처벌도 뒤따릅니다.
불신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민수 13-14장의 가나안 정탐입니다. 모세가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찰하게 한 것 자체는 하느님의 명으로 이루어진 일로 나타납니다(민수 13,1-2). 그 열두 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과 주민들을 살펴봅니다.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열 명은, 그 땅의 주민이 우리보다 강하여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민수 13,31). 칼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으로 가자고 하지만, 백성들은 주저앉아 아우성치고 통곡합니다(민수 14,1).
그들은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로마 4,21)하였다면, 그 땅 주민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러 모리야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었다면,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6) 오히려 그 좋은 땅을 보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기에 군사력을 비교하고는 절망에 빠집니다.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우리의 힘으로 그 땅을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민수 14,2). 그들은 광야에서 칼에 맞아 죽느니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민수 14,3). 하느님의 약속은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갖게 하지 못합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실제로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바라지 않던 결과를 맞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믿지 못했으므로, 약속을 믿었던 칼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광야에서 죽고 그 다음 세대가 비로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들의 말대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계속 종살이를 할 것인가 아니면 광야에 나가서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종살이를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능한 선택은 오직 두 가지였습니다. 이집트를 떠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도달하거나, 아니면 그 도중에서 죽거나. 이집트 땅의 종살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을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기차가 선로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어떻게든 선로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돌려 놓으려고 애쓰다가 끝까지 실패하거나 옆으로 넘어갈지언정,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가야 합니다.
끝까지 가거나, 도중에 죽거나. 끝까지 갈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민수기에 따르면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광야는 그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움 없이 드러냅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이라면 불안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자신의 불신을 감출 수 없는 장소입니다. 순간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피나는 노력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도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광야가 이집트와 하느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 중간의 장소였듯이 우리도 완성된 세상을 향한 여정의 순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95,7-8에서는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이라고 일깨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11).
[평화신문, 2015년 2월 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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