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2] 실낙원, 그리고 다시 찾은 파라다이스
한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다가,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라 하시니 모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럼, 지금 가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라 하시니 아무도 들지 않았단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에녹’(창세 5,24), ‘엘리야’(2열왕 2,11), ‘성모님’을 제외하고 죽음의 법칙을 피해간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닥칠 것이고, 그 때문에라도 한 번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하느님 나라는 흔히,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함이 깃든 세계, 더러움으로 얼룩진 현세와 다른, 완벽함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그 낙원을 ‘파라다이스’라 불러왔다.
그런데 이 ‘파라다이스’에 대한 열망은 사실,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도 에덴동산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며, 하느님을 자유롭게 만나던 에덴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했기에 더욱 간절했다.
아담의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는 단어로만 보면 처음부터 ‘낙원’이 아니었고, 내세적인 공간과도 상관없는 어원에서 나왔다.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자’에서 파생했기 때문이다. ‘파이리다에자’는 ‘정원’, ‘공원’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울타리 쳐진 정원’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이 ‘파라데이소스’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에덴동산에 평화로운 정원이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히에로니무스에 의해 대중라틴말 성경에 도입되어,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에덴에는 ‘무화과’, ‘선악과’, ‘생명나무’가 자랐고(창세 3장), 에제키엘서에(31,8) 따르면 ‘향백나무’, ‘방백나무’, ‘버즘나무’ 등도 있었다. 흥미롭게도 키 큰 나무만 자랐으며, 풀이나 작은 초목은 없었다(창세 2,5). 성경에서는 키 큰 나무가 ‘신성함’과 ‘우수성’을 상징했기 때문이다(시편 92,8.13에서는 “의인”을 “야자나무”와 “향백나무”에, “악인”은 “풀”에 비유한다.).
에덴동산은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원천이었으므로, 비가 내리지 않았다(창세 2,5). 그 대신 땅 밑에서 “안개 같은 물”이 올라와 풍요롭게 가꾸어주었다(창세 2,6). 원조들이 선악과를 제외한 열매들을 먹도록 허락받은 것으로 보아(창세 2,16), 태초에는 모두 채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육식은 대홍수 이후에야 허락되었으며(창세 9,3), 이것이 인간과 짐승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을 원인학적으로 설명해 준다.
뱀의 유혹과 실낙원
원조들이 파라다이스에서 독립(?)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뱀이다. 그런데 뱀이 저주를 받아 배로 기게 되었음은(창세 3,14), 그전에는 다리가 있었을 가능성, 곧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음을 시사해준다. 더구나 신기한 것은, 뱀이 말하고 논쟁할 수 있는 ‘영특한’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뱀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들 가운데 가장 ‘간교했으며’(창세 3,1), 묵시 12,9는 이 뱀을 ‘사탄’으로 풀이했다. ‘간교하다’는 히브리어 ‘아롬’을 옮긴 말인데, 기본적으로 ‘영리하다’ ‘슬기롭다’는 뜻이 있다(잠언 12,23의 “영리한 사람” 참조).
마태오 복음은(10,16)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는 말로, 뱀의 단점은 비둘기의 순박함으로 채우고 영리하고 지혜로운 특성만 닮으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리함이 간교함으로 나타나 죽음처럼 치명적이 된 뱀의 유혹은 원조들을 에덴에서 내몰았으며, 스스로 문명을 개척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 유다 전승은, 원조들이 따 먹은 ‘선악과’를 ‘무화과’라고 보았다. ‘선악과’를 먹자마자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이다(창세 3,6-7).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무화과가 가진 상징성 때문에, 경건한 유다인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탐구했다고 한다(요한 1,48 참조).
그리스도교에서는 ‘사과’를 ‘선악과’로 보는 전승이 있었다. ‘악’을 뜻하는 라틴어 ‘말룸’이 ‘사과’라는 의미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자는, 하느님이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서 원조들을 죄짓게 만들었느냐고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허락하시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주입된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또 유혹을 견뎌낼 줄 아는.
우리도 어린 자녀들에게, “부엌칼 만지지 마라, 가스레인지 조심해라.” 주의를 많이 주지만, 온실 속 화초로만 키우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악과는 신기한 마법의 힘을 가진 나무라기보다, 하느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선악과’일 것이다. 곧, 선과 악이 무엇인지, 죄책감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사과였든 무화과였든 그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들 가운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언급하므로(창세 2,10-14), 이것을 실마리 삼아 에덴동산을 찾으려는 시도들도 많았다. 창세 2,8은, 하느님이 “동쪽”에 에덴동산을 꾸미셨다고도 전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이스라엘 기준의 동쪽이므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곧 현재 이라크 방향이다.
그러나 “피손”이나 “기혼”은 실존하는 강이 아니었던 듯하다. 특히 “기혼”은 매우 상징적인 이름으로서, 강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생명수를 공급하던 샘이다. 바꿔 말하면, 에덴동산은 원죄 이후 금지구역이 되었기에, 성경은 실제 지리에서 찾을 수 없는 강 이름으로 그 위치를 감추려 했다.
성전에서 찾은 파라다이스
고대 히브리인들은 비록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나, 간접적으로나마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에덴동산에 함께 언급된 “기혼”이 그 힌트를 제공한다. 기혼은 성전 아래쪽에 위치한 샘으로, 솔로몬은 이곳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1열왕 1,45). 곧, 성경은 “기혼”이라는 이름에 에덴에 대한 단서를 희미하게 남겨둔 셈이다.
에덴동산과 성전의 공통분모는, 두 장소 모두 죄 없는 정결한 상태에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에덴의 입구가 동쪽이었던 것처럼(창세 3,24),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문은 지성소 맞은편의 동쪽 대문이었다(에제 43,1-4). 에덴동산 입구에서 ‘커룹’들이 지킨 것처럼(창세 3,24), 지성소의 계약궤 위에는 한 쌍의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다(탈출 25,22등).
에덴의 “생명나무”는 성소를 밝히는 꽃나무 모양 ‘일곱 촛대’에 투영되었다(탈출 25,31-36). 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지성소’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직 일 년에 한 번 대사제만 속죄예식을 위해 들어갈 수 있었다(레위 16,2,15). 곧, 일반인들에게 지성소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에덴동산은 여전히 인간의 손에 닿을 수 없었다.
파라다이스, 하느님 나라
그러나 에덴동산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은 그곳을 마지막 시대에 도래할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청사진으로 세우게 했다. ‘에덴으로의 회귀’ 소망은 대표적으로 이사 11,6-8; 66,25에 나타난다. 이 신탁은, 다윗 후손 메시아가 통치하는 날 인간과 짐승 사이의 적대감이 사라지고, 모든 피조물이 에덴에서처럼 평화롭게 공존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활사상이 강해지던 헬라 시대에는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내세적인 “낙원”의 의미로 발전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 하신 루카 23,43의 “낙원”이 바로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이 셋째 하늘로 들어올려져 “낙원”에서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는 사건을 이야기한다(2코린 12,4).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주겠다.”는 묵시 2,7에도 같은 낱말이 나타난다.
게다가 묵시록은 “하느님의 낙원”과 함께“생명나무”를 약속한다. 이것은 훗날, 원조들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도록 커룹들이 에덴의 입구를 지켰던 상황과 반대가 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곧,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이 ‘땅’으로 돌아가는 날(창세 3,19), 하느님이 넣어주신 “숨”(창세 2,7)은 본향인 하느님 나라, 곧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다시 찾은 파라다이스
에덴의 축소판이던 성전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이제 “성전”이 되신 예수님에게서(요한 2,21) 다시찾을 수 있다. 에덴동산의 생명수는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으로 다시 이어져 왔다(요한 7,38). 게다가 예수님의 피로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었으니(1코린 3,16), 현세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언젠가 인상 깊게 읽은 글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죽음을 망각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죽음과 그 이후를 생각하는 사람은 착해지고 싶어하며, 부끄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잡생각에 해당하지만, 죽음 앞에 떳떳해지려 노력함으로써 그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고 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파라다이스’, 곧 현재와 미래의 에덴동산을 묵상해 본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느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았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2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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