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화와 영성 (3) 예수님의 부르심 1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카라바조의 그림 〈성 마태오의 소명〉을 함께 감상하고 그 영성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이 그림과 교황 프란치스코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모토(motto)는 “Miserando atque eligendo(자비로이 부르시니)”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마태 9,9)와 관련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황의 모토는 마태오의 소명 이야기에 대한 베다(Beda) 성인의 강론에서 유래한다. 베다 성인은 마태오의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세리를 자비 가득한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그를 부르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세리 한 사람을 보신 뒤, 사랑의 감정으로 그를 주목하셨기에, 선택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교황 프란치스코의 이 모토는 하느님의 자비와 부르심에 대한 젊은 시절의 깊은 체험과 관련이 있다. 열일곱 살이었던 1953년 9월 21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교황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모범을 따르는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회의 수도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주교로 서품될 때 그는 “자비로이 부르시니”를 모토로 선택하였고 교황이 되어서도 같은 모토를 사용하게 되었다.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8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이 모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전에 로마에 오면 자주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그림을 감상하고, 묵상하러 가곤 했다고 말씀하셨다.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은 1598-1601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322×340cm이며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에 있는 콘타렐리 경당(Contarelli Chapel)에 있다. 이 경당에는 〈성 마태오의 소명〉과 함께 〈성 마태오의 영감〉(The Inspiration of St. Matthew), 〈성 마태오의 순교〉(The Martyrdom of St. Matthew)가 있는데, 마태오와 관련된 이 연작 작품들로 말미암아 카라바조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성 마태오의 순교〉를 먼저 그리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멈추고 〈성 마태오의 소명〉을 그렸다고 한다.
화가 카라바조의 대표적인 걸작인 〈성 마태오의 소명〉은 예수님이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묘사한다. 즉 그림은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가 세관으로 마태오를 찾아온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마태오를 가리키며 부르신다. 카라바조는 세리 마태오를 다른 네 사람과 함께 탁자에 앉아 있는 인물로 표현한다.
카라바조는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도 빛과 어둠의 놀라운 대비를 표현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의 한 줄기 빛은 극적인 긴장감을 높여준다. 사실 카라바조 이전의 종교화에는 밝고 아름다운 장면만이 묘사되었고 어둠이나 그림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명암법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표현했다. 〈성 마태오의 소명〉 그림의 오른쪽에서 빛이 들어와서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춘다. 그림은 복음서의 이야기를 표현하지만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카라바조 당시의 일상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벽의 창문은 닫혀 있고, 빛은 이 창문을 통하여 비추지는 않는다. 어둠 속에 비추는 빛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의 상단으로부터 어둠의 공간에 빛이 쏟아진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손짓을 그대로 따른다. 예수님의 손에 빛이 가득하다. 따라서 이 빛은 어둠을 가르는 구원의 빛이다.
마태오를 가리키며 그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손짓에서 우리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년)의 천정화 〈천지창조〉에서 아담의 창조 장면을 떠올린다. 미켈란젤로는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아담의 창조를 재해석한다. 강렬하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빛의 하느님은 손가락 끝으로 아담에게 생명의 숨결을 전달하신다. 하느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와서 땅의 아담에게 영혼을 불어 넣으신다. 우리는 <천지창조>에서 하느님의 창조의 손짓을 만난다면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의 손짓을 만난다. 이와 같이 창조와 구원은 서로 상통한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과연 세리 마태오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다섯 인물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다. 빛이 탁자에 앉은 다섯 사람들에게 비추지만 과연 예수님의 손짓이 가리키는 대상은 누구일까? 이 그림을 해석하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마태오의 정체에 대한 이론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먼저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탁자의 다섯 명 중 가운데에 있는 수염을 기른 중년의 인물을 세리 마태오로 해석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깜짝 놀라며 “저 말입니까?”라고 말하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응답과는 대조적으로 탁자의 다른 두 세리는 여전히 돈 계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마태오의 모습이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영감〉과 〈성 마태오의 순교〉에서 묘사된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오는 탁자의 왼쪽 끝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젊은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헤아리느라 정신이 없다. 세리인 마태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이 경우 수염을 기른 인물의 손짓은 이 젊은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 말입니까?”라는 의미를 표현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젊은 마태오가 머리를 들어 예수님을 보기 직전의 순간을 묘사한 것이 된다.
과연 그림에 나오는 수염을 기른 인물의 손짓은 자신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옆에 앉아 있는 머리를 숙인 젊은이를 가리키는가? 이 두 해석의 가능성 중에서 최근에는 후자의 경향이 더 강하다. 그런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카라바조가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애매모호함을 제공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의 등장인물들 중 어느 한 사람을 마태오로 해석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부르시는 대상인 마태오는 그림을 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라고 설명한다. 이제 우리는 세리 마태오의 소명 이야기와 그것을 해석하고 표현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지는 영성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5년 3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c/caravagg/04/23conta.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