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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15: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여호 19,5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22 조회수3,296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5)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여호 19,51)


믿음을 통해 이뤄진 하느님 약속



유혹의 산에서 내려다본 예리코 전경.


이번에는 좀 다른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기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고학이고 역사학이고 나는 관심 없다, 그저 성경에 나오는 말씀만 그대로 믿겠다 하신다면,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호수아기와 판관기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면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여호수아기는 일사불란합니다. 열두 지파는 하나로 똘똘 뭉쳐 가나안 전체를 착착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판관기는 다릅니다. 지파들이 각각 산발적으로 조금씩 영토를 정복합니다. 정복하지 못한 지역도 여기저기에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판관 1,27-35). 또, 여호수아기 안에도 이스라엘이 남아 있는 가나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여호 23-24장, 스켐). 여호수아 시대에 이미 다 정복한 것 같은 땅을 다윗이나 솔로몬이 다시 정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 12,10에서는 예루살렘도 이미 정복되는데, 2사무 5,6-9에서는 다윗이 여부스인들의 도성이던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다음, 천문학. 성경과 자연과학의 문제에 있어 창조와 진화 문제 다음으로 유명한 갈릴레이 사건이 여호수아기와 관련됩니다. 여호 10,12-13에서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를 멈추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멈추려면 해가 움직이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천동설이 옳고 지동설은 틀리고, 갈릴레이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이제 고고학입니다. 성서 고고학이 처음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열심한 고고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요. 그런데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예리코의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기원전 13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고학 연구 결과, 예리코는 그 시대에 성벽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기원전 3천년대에 파괴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나 아이에 갔을 때에는 무너뜨릴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정복에 대하여 새로운 가설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이라고 하지만 벌써 50년이 지나서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된 가설들입니다. 일단, 군사 정복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열두 지파의 통일된 군사행동이라는 것은 이 시대에 아직 어려웠을 듯합니다. 좀더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는 하겠지만 인구의 이동과 정착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올라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요르단을 건너와서 팔레스티나 중부를 거쳐 스켐까지를 정복하는 데에서는 여호수아의 역할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평화적 침투 가설도 있습니다. 기원전 12세기에 팔레스티나에서 유목민들이 농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이 작은 무리들로 이 땅에 침투해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토 정복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1960년대부터 한동안 많이 제기되었던 가설입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매우 계층화된 사회였는데, 거기에서 하층민들이 그 체제를 피하여 산간지대로 옮겨가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외부에서 온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결론은 한 마디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과정은 여호수아기가 말하듯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군사 정복과 소규모의 평화적 이주 그리고 가나안 도시국가들 자체 내의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기는 그 과정을 단순화하여, 여호수아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묶어 이집트 탈출에 연결짓습니다. 영토 정복과 영토 분배, 그 모든 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여호 13,1-7에서 밝히듯이 여호수아기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영토를 열두 지파에게 분배한다는 것은, 그 땅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어느 지파에게 어느 땅을 나누어 주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후손들은 여호 13-21장에서 자기 집안의 이름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이 주어졌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처럼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그 땅을 주실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기는 말하자면 그 약속의 보증과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옮기면 ‘예수’가 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 대해, 후대인 기원전 2세기의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용감하였고 예언자로서는 모세의 후계자였다. 그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그분께서 뽑으신 이들 가운데 위대한 구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상속의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었다”(집회 46,1).

[평화신문, 2015년 3월 22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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