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41) 아나톳
슬픔과 비애가 깃든 도시
아나톳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km 지점에 있는 벤야민 지파의 지역 중에서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였다.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8). 다윗을 도왔던 용사 아비에제르와(2사무 23,27) 예후(1역대 12,3)도 아나톳 출신이었다.
쫓겨난 에브야타르 사제들이 머물러
다윗이 사망하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된다. 당시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솔로몬이 승리하자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제 저를 세우시어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히시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집안을 일으켜 주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아도니야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 임금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내려치게 하니, 아도니야가 죽었다”(1열왕 2,24-25). 그리고 아도니야 편에 섰던 대사제 에브야타르는 아나톳으로 쫓겨나게 된다. “임금은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톳에 있는 그대의 땅으로 가시오. 그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느님의 궤를 날랐고, 또 아버지와 온갖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1열왕 2,26).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 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셋길이 막혔다. 아나톳에서 에브야타르 계열 사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지켜보며 쫓겨난 제사장 가문의 슬픔과 비애를 맛보았다.
아나톳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레미야 예언자다. 예레미야의 부친은 아나톳에 살고 있던 사제였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남쪽 유다는 주변 강대국의 힘에 눌려있는 신세였다. 유다도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다 백성들에게 이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과 테러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불행한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이 대부분 왕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하느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말라고 예언해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무모하게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요시야’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킨’, ‘치드키야’ 등 4명의 왕은 모두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고 만다. 결국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빌론의 진격으로 파괴돼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는 (2열왕 24,17) 예레미야가 전쟁을 반대하자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아나톳은 바빌론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때 대부분 파괴됐다(이사 10,3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벤야민 지파에 의해 아나톳은 재건됐고 느헤미야 통치 때는 많은 사람이 거주했다(느헤 11,32). 이처럼 아나톳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히 슬픔과 비운이 깃든 도시였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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