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기도] 세 가지 청원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 해설 3 지난 호에서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에 따른 ‘주님의 기도’(마태 6,9-13) 가운데, 첫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저희] 아버지”라는 호칭의 의미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에 나오는 세 가지 청원을 살펴보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1) 이 청원의 그리스어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이다. 예스러운 어투로 번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지어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수동태’는 이른바 ‘신적(神的) 수동태’(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사용하는 수동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첫 청원에서 ‘거룩하게 하다’의 주체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당신[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라는 수동태 문장은, “하느님[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청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이름은 다만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기능만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본질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함’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분’으로 이해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 6,3)라는 말이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체험이다(레위 19,2; 호세 11,9: 이사야서에 자주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야훼’라는 그 ‘거룩한 이름’을 자신들에게 몸소 계시해 주셨다고 굳게 믿었다(탈출 3,13-15 참조). 이스라엘에는 이 사실 자체가 지극히 은혜로운 일이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불러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다음 말씀이 참 좋다. “이름은 상대방에게 말을 걸 수 있고 상대방을 부를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은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낸다”(「나자렛 예수」 제1권, 박상래 옮김, 222쪽).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으로 가르치셨다. 하느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당신의 온 삶으로 계시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부를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주셨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런데 어떤 경우에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가?”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모독을 받거나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로마 2,24; 이사 52,5 참조), 거룩하고 고귀한 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가르친다(에제 36,22 이하 참조). 구약성경(예컨대, 레위 22,32)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낸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 ‘주님의 기도’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행위보다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에 있다.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주시기를 청원하는 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에제 36,22-28의 말씀이 잘 보여준다. 그 가운데 23절만 인용한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이 말씀은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향’이라는 배경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 중이던 당신 백성을 고국으로 데려오시는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곧 구체적 구원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신다는 것이다(집회 36,3-4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구약의 구세사에서 이미 드러났다. ‘야훼’[주님]라는 이름은, 그분의 이름만 들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Exodus)의 하느님’,‘전능하시며 자애로우신 구원자’를 떠올릴 수 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통해 결정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들은 과거(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알고 있던 그런 모습만 지니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계시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게 해주십사고 청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2) ‘하늘나라[하느님 나라]의 다가옴’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핵심내용이다(마태 4,17; 5,3.10; 또한 마르 1,14-15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당신의 이 핵심 관심사가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아버지[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청원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미래적인 요소로 전제한다. 그렇지만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당신의 말씀과 권능의 행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하였음을 분명하게 하시고 있다. 마태 12,28을 보자.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1,4-6; 13,17 참조).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했지만, 그 나라의 완성은 아직 오직 않았으며, 그 완성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완성될 나라가 오기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청원을 오늘의 우리 신앙인에게 적용해 다음과 같이 묵상해 본다. 우리는 날마다 세상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세력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거짓 주인들을 제압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이 진정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기를 청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이 다른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거나, 숨어 계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하느님이심(하느님께서 세상과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드러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청원은 루카 복음서에는 전해지지 않고 여기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앞에 나온 두 청원, 곧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를 설명하거나 종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 청원은 하느님께서 천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당신의 통치[다스림]를 바로 세우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궁극적으로 세워주십사는 청원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수난을 앞두시고 몸소 이 기도를 바치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잘못된 기도자세의 예로 든 ‘수다스러운 이방인들의 기도’(마태 6,7)의 잘못된 점은, 바로 그들이 그렇게 많은 말로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기다리지 않는 데 있다.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사실은, 우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신다는 점이다(마태 6,8 참조).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과 신뢰야말로 기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도 필요하다(마태 7,21 이하; 12,48-50 참조). ------------------------------ 1)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도문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이다. 2) 공식 기도문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이다. 그리스어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당신의 나라가 올지어다.”)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최근 「로마서」(성서와 함께, 2014년)를 저술했다. [경향잡지, 2015년 5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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