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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 어린양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30 조회수5,351 추천수1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 어린양 (1)



묵시록의 전형적인 그리스도 어린양에 대한 주제는 많은 학자들이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나 용어 자체부터 전체적인 해석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린양의 주제는 어린양 주위에 있는 다른 형상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도 그만큼 중요하다. 또 그 반대로 그 형상들을 이해함으로써 어린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묵시록의 표현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떤 인물이나 요소가 여러 번 나올 경우 언제나 첫 번째 소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묘사를 해석할 때에도 첫 번째 소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묵시록에서 어린양에 대해 처음 소개하는 곳은 5,6-8이다. 바로 그 앞에는 ‘두루마리’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데(5,1-5), 이 단락은 이야기의 긴장을 점차 끌어올리면서 어린양에 대한 소개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두루마리

“나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5,1).

오른손 안에 있는 완성된 문서

두루마리는 ‘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 안에 있다. ‘어좌’는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능동적 통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두루마리는 그분의 ‘오른손’, 곧 그분의 확고한 능력 안에 자리하기에 완전히 그리고 독점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이어지는 봉인에 대한 설명은 인간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가 구체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다.’ 이는 이미 완성된 문서임을 보여준다. 더 이상 빈 공간은 없고 인간과 인간 역사에 관련된 모든 것은 명백히 규정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두루마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기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그것을 읽고 싶어 한다.

그 긴장은 방해물 때문에 더욱 고조되는데,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되어’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완전히 닫혀 그 내용에 다가갈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인간 역사는 분명히 하느님의 권능과 통치 아래 있지만,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내용

그렇다면 두루마리의 내용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학자들은 여러 학설을 내세우지만 상징적 차원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저자는 삼중의 상징을 통해 두루마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오른손), 완성된 것이며(안팎의 글씨), 인간에게는 완전히 접근 불가능한 것(일곱 번의 봉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어린양은 봉인을 하나씩 떼고, 그 내용은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곱 수(일곱 봉인, 일곱 대접)의 마지막 일곱째가 언제나 다음 부분을 여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한 계시는 일곱째 봉인을 떼는 것(8,1)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묵시록 전체에 걸쳐 마지막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곱째 봉인은 일곱째 나팔 부분(8,1-11,14)을 연다. 이 일곱째 나팔은 세 표징과 일곱 대접 부분(11,15-16,16)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며, 일곱째 대접은 다음에 나오는 ‘위대한 날’에 대한 소개(16,17-22,5)를 여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슬 구조를 통해 두루마리의 내용은 묵시록 전체의 내용과 같은 것이며, 역사적으로 실행되어야 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원 계획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것이고, 완결되어 있으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두루마리는 오직 어린양만이 뗄 수 있는데, 그분의 승리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준비되어 왔고, 부활의 신비 안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해하고 실행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묵시록은 여기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하나의 요약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의 실현은 하느님 안에 숨겨진 신비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그 신비는 그리스도 안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실행되는 것이다.


네 생물

그리스도 어린양은 5,6에 처음 나오는데, 이 구절은 5,6-14의 더 넓은 단락에 속한다. 이 단락은 어린양에 대한 소개(6절), 어린양의 두루마리 소유(7절), 그리고 그에 따른 찬양(8-14절)으로 이루어진다. 이 찬양은 동일한 문학적 통일성 안에 속하면서도 각기 다른 주인공으로 이루어진 동심원의 확장을 통해 고유한 전개를 보여준다.

찬양의 주체는 먼저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8-10절), 수없이 많은 천사들(11-12), 그리고 모든 피조물(13절)로 확장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다시 생물들의 아멘과 원로들의 경배로 마무리되면서 수미상관을 이룬다. 곧, 처음과 끝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중심점은 그리스도

어린양은 먼저 생물들과 원로들과 함께 소개된다(5,6ㄱ :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어좌’는 인간적 경험의 영역 안에서 존엄성의 차원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어좌로서, 하느님께서는 그 어좌에 앉으셔서 역사에 대한 당신의 능동적 영향을 행사하신다(4,2 이하 참조). 하느님의 이런 활동에서 어린양은 관념적으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활동은 결정적으로 어린양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어린양은 ‘네 생물들 한가운데’(「성경」에서는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한가운데’이다.) 계신다. 곧 그리스도는 네 생물의 활동에서도 그 중심점이 된다.

네 생물의 의미

네 생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려면 그들에 대해 처음 소개하는 4,6ㄴ-8을 살펴보아야 한다.

묵시록의 저자는 네 생물을 소개하면서 연속된 상징을 사용한다. 첫째, 그들은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 ’위치한다. 둘째, ‘앞뒤로 눈이 가득 달렸다.’ 셋째, 그들은 각각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넷째, 그들은 ‘여섯 날개’를 지니고 있다. 다섯째, ‘사방으로, 안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에 대한 상징을 다시 취하고 있다(4,8).

네 생물에 대한 이 상징적 묘사를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네 생물의 기원, 그리고 영감을 주었던 모형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처음에 학자들은 신화와 점성술(이를테면, 별자리 등)에서 찾으려 하였다. 현대에는 그 기원을 구약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론이 우세하며, 결정적으로 에제 1,5과 1,18이 그 시작점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묵시록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구약을 인용할 때에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한다. 네 생물의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네 생물을 통해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가?

에제키엘서와의 상징적 비교

학자들의 이론은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다양하지만, 묵시록의 모델인 에제키엘서와의 상징적 비교를 통하여 살펴보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저마다 넷이었다”(에제 1,5-6). “그들의 얼굴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에제1,10). “바퀴 테두리는 모두 높다랗고 보기에 무서운 데다, 그 네 테두리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다”(에제 1,18).

이와 같이 에제키엘은 생물 각자에게 네 개의 얼굴을 모두 부여하고 있지만, 묵시록의 저자는 네 개의 형상을 각각 하나의 생물에게 부여한다. 또한 에제키엘이 바퀴에 부여하고 있는 ‘가득한 눈들’을 묵시록 저자는 네 생물에게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에제키엘서에서 출발했지만 그 기원을 사용하는 데에 자유로움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묵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의 정체성이나 역할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반드시 에제키엘서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확실하다.

묵시록과 에제키엘서의 본문을 비교하면서 저자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또 무엇을 편집했는지 확인하고, 그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본질적인 작업이라고 하겠다.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9월호, 이성근 사바]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 어린양 (2)



지난 호에 이어 요한 묵시록의 전형적인 주제인 ‘그리스도 어린양’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어린양 주위에 있는 다른 형상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또한 그 형상들을 이해함으로써 어린양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생물의 상징적 묘사

네 생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상징적 묘사는 그들을 처음 소개하는 4,6ㄴ-8에 나온다.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상징적 차원이다.

인간학적 상징에서 이 ‘어좌’는 하느님의 어좌이고,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앉으셔서 역사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어좌 ‘둘레에’ 있다는 것은 네 생물이 하느님의 하늘 궁전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어좌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들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활동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와 활동은 하느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분의 초월성 아래에 있지만, 인간의 검증을 넘어서는 차원임을 보여준다.

눈으로 가득한 네 생물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이라는 두 번째 상징적 차원은 눈들에 집중된다. 바퀴에 달린 눈들을 이야기하는 에제키엘서와 달리 묵시록의 저자는 눈들을 생물에게 직접 부여한다. 생물들은 “앞뒤로”(4,6ㄴ), “사방으로 또 안으로”(4,8ㄱ) 눈을 가지고 있으며, 눈으로 “가득”하다. 이는 네 생물 모두에 해당되는, 그들의 특징이다.

이 눈의 표상은 일반적으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주님의 눈”을 이야기하는 즈카 4,10에서 온 것으로 본다. 묵시록은 이 표상을 다시 취해 어린양에게 부여하면서(5,6: “눈이 입곱”이신 분)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라고 설명한다. 즈카르야서와 묵시록에는 이 표상을 해석하려는 두 단서가 나온다. 바로 땅과 연관된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 그리고 성령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세분화된 네 생물의 모습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4,7). 세 번째 상징적 차원은 네 생물의 모습을 세분화하고, 개별 생물들을 각각 인간적 차원의 실재와 비교한다. ‘어좌’의 천상적 차원에서 인간적 차원으로의 전이가 일어나고 있다. 저자가 문학적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에제키엘서에서 가져온 이 네 가지 모습은 비록 분명하지는 않지만 인간 세상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5,5에서 어린양에게도 부여되는 ‘사자’는 활력과 힘을, ‘황소’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다산성(多産性)을 상징한다. ‘독수리’는 에제키엘서의 원형과 비교하여 “날아가는”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는데, 같은 표현이 8,13에도 나온다. 이는 역사의 점진적 전개를 강조하면서 구세사의 추진력을 암시한다.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다”(4,8). 이 네 번째 상징적 차원의 원형은 에제키엘서가 아니라 이사 6,2이다“(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여기에서 생물들은 다시 초월성의 차원으로 옮겨진다. 그들은 이사야서에서 사랍들이 하던 일, 곧 어좌의 하느님을 찬양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4,8). 다섯 번째 상징적 차원은 두 번째 차원에서 나온 눈의 상징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앞뒤가 연결되는 관계를 이룬다. 이는 눈이 생물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상징의 요소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4,8) 네 생물은 끊임없이 찬양에 전념하는데, 그 내용은 이사 6,3에 나오는 사랍들의 찬양과 같다.

세 번의 ‘거룩하시다’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최상급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미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그 안에 갇혀있지 않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풍요로움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피조물 안에서의 이 일반적 계시는 하느님의 전형적 호칭“(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을 통해 하느님과 역사의 관계로 대치된다. 하느님께서 지난날에 이미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현재에도 구세사와 함께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것으로 구세사를 마무리하실 것이다.

성령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역동성

요약하자면, 묵시록의 저자가 네 생물을 묘사하는 상징적 틀의 세밀하고 복잡한 구성과 묵시록에서의 등장 횟수(단수 또는 복수로 20번 나옴)는 그들의 중요성을 웅변해 준다. 네 생물은 하느님 차원에서 인간 역사로 향하고, 다시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 차원에 도달하는 역동성을 구조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역동성은 성령의 활동으로 실현된다. 생물들의 모습에서나 활동에서나 그들이 표현하는 것은 이 역동성이다. 하느님 차원에 위치하고 ‘(어좌’), 그분을 향해 있으며‘(날개들’), 인간 경험에서 가져온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인간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숫자가 넷이라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숫자 4는 지상의 네 방위(동서남북) 또는 네 바람과 관련된 것으로 총체적이며 세계적인 전망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네 생물은 지상의 실재 전체를 포함한다. 이런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땅과 하늘, 내재성과 초월성은 상호 전이되고 교환되는데, 그 중심에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따라서 생물들은 천사나 어떤 인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향 아래 일어나는 전이와 교환, 그 역동성을 표현한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세사가 된다. 이 구세사가 마무리될 때, 곧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생물들이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내재성과 초월성의 구분이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물네 명의 원로

어린양은 원로들에 대해서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5,6: “원로 한가운데”). 묵시록에서 자주 보이는 원로들은 복잡한 상징을 지니고 생물들과 함께 많이 나온다. 이 상징의 기원을 알기는 쉽지 않으나, 상위의 신 주위에 있는 하위의 신들이라는 신화적 바탕은 제외되어야 한다. 저자는 어떤 형태이든 이교사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탈출 24,1-11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명”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 더 그러할 듯하다.

스물넷은 유일한 하느님 백성

묵시록에서 원로들에 대한 소개는 4,4에 처음 나온다.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원로들은 하느님의 어좌 둘레에 위치한 자신들의 ‘어좌’에 앉아있는데, 이는 구세사에서 그들이 맡은 능동적인 참여와 역할 그리고 영향력을 지칭한다. ‘어좌’와 마찬가지로 ‘앉아있다’란 표현도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로서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능동적 영향력을 표현한다.

‘스물넷’이라는 숫자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배합으로 여겨진다(21,12.14 참조). 이는 구약과 신약의 두 단계를 염두에 둔 유일한 하느님 백성을 표현한다.

구세사에서만 이루어지는 원로들의 역할

‘원로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지혜와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신약에서 지혜문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역할을 암시한다.

“흰옷을 입고”에서 ‘옷’은 묵시록의 인간학적 상징으로서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한 사람의 자격 또는 상태를 지칭한다. 흰색은 색상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초자연적 차원을 뜻한다.

“머리에 금관을 쓴”에서 ‘관’은 이미 완결된 어떤 긍정적인 활동(승리 등)을 지칭하며, 관은 그 보상이다. 원로들은 실현되고 인정된 구원의 상황에 있는 것이다. 금은 전례와 하느님과 근접함을 표현하는 금속이다. 따라서 원로들은 하느님과 특별히 근접한 상황에 그리고 전례적 공동체와 연관된 것으로 드러난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역할을 담당하는데‘(옷’), 그것은 비록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그것에 종속되지만 능동적이고 왕적이며‘(어좌들’, ‘앉아있는’) 교회의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원로들’). 그들은 하느님과 교회 자체의 전례적 중재를 실행한다‘(금’).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원로들도 새 예루살렘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구세사의 전개에서만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개별 원로들에 대한 설명 없이 그들의 역할과 상태만이 설명되고 있는 것은, 묵시록의 내용을 듣는 청중이 자신에게 친근하며 영감을 주는 성경의 성인들의 이름으로 채워야 함을 의미한다.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현재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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