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2)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이사 56,1)
인간의 불공정과 불의가 구원을 가로막으니
- 이스라엘인들의 귀환을 허락한 키루스 임금 부조.
새 집에 이사하게 되어 기대에 부풀었는데, 막상 가 보니 수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전기도 없으며 아직 도배도 안 되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집이 반쯤 무너져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귀향이 드디어 이루어졌는데 왜 상황이 이 모양인지 설명해 주는 것이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2이사야까지 읽고 나서도 이사야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을 위로하며 징벌의 기간이 끝나고 해방이 다가왔음을 선포했었습니다(이사 40─55장). 더 시간이 흘러, 이제 이스라엘은 바빌론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완성된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이 이사야 예언서 제3부(56─66장)이고, 이 부분의 저자를 편의상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구체적인 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아닐 듯합니다.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누군가가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은 때에(기원전 538~520년 사이) 그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사야서의 앞부분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예언자의 선포와 하느님의 약속은 어디로
논리적으로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서도 이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앞부분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그의 문제는 앞에서 특히 제2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이 왜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2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게, 온 세상이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고 알리면서 “떠나라, 떠나라, 거기에서 나와라”(이사 52,11)고 귀환을 독려했습니다. 귀향길은 이집트에서 떠나오던 그 길보다도 더 영화로우리라고 목소리를 높였었습니다.
물론, 키루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고 덕분에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돌아왔지요.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나는 것 같은 체험이었습니다(에제 37장 마른 뼈 환시 참조). 그러나 돌아와 보니 여기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온갖 문제들이 벌어집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과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 그 사이에서 살고 있던 이방인들, 팔레스티나 밖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기대했던 구원은 왜 실현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울까요?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 것일까요? 과거에 예언자들이 선포한 약속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하느님은 약속만 하시고는 그 약속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신 것 아닐까? 이 어려운 상황에는 하느님도 어쩔 수가 없으신 것 아닌가? 더 이상은 하느님께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제3이사야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 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59,1-2).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56,1).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가까이, 문 앞에까지 와 있으나 그 구원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죄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이사야서에서 첫 장에서부터(1,27부터) 여러 차례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정의와 공정’을 호소합니다.
여기에는 유배 이전 예언자들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할 때와 유사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에제키엘의 경우를 기억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바빌론의 신들보다 힘이 약하시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성전을 떠나가시고, 그래서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전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 아직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하느님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에, 그 잘못이 구원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실천하라고, 단식하고 기도한다고 앉아 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보살피며 너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그들에게 나누라고 외칩니다(58장).
여기에 따라오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들만이 구원을 누릴 수 있다면,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이들은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구원되고 다른 민족들은 멸망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민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구원의 여부가 갈라지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려 보이는 예루살렘의 미래는, 세상의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하러 모여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 공현 대축일에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기억하며 읽는 독서가 이 부분에서 나옵니다. 그날에는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56,3)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에서 당신 백성을 모으십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전망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구원은 문 앞에 와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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