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2) 아브라함의 기도 (상)
모든 것 버리고 떠나라 “네”
-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 아브라함의 손님 환대 모습을 그린 세밀화. 출처=「성경 역사 지도」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어느 때 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셨나요?”
신학교 입학 때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하셨던 질문이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난 언제 열심히 기도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열심히 기도했던 때는 항상 시험 전날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항상 같은 기도를 반복했다. “주님! 이번 시험만 꼭 잘 치르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다음에는 미리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 마지막 시험까지도 같은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대화이다. 대개 일방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강요하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저 내 이기적인 내용만 주절주절 털어놓고 부탁을 드렸던 것 같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러나 난 주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나만 떠들고 만 셈이다. 안타깝게도 친구들 모임에서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저 잘났다고 혼자서 떠들어대는 사람은 기피대상이 되기 쉽다.
아브라함은 신앙인의 전형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신앙인에게 모델이 된다.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우리 인간이 응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보통 공식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일생 철저히 시험에 들며 엎치락뒤치락하며 고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1-2).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응답으로 항상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모범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명이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식별하고 순종해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곳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이별한다는 것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위험한 행위였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영원한 이별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브라함의 고향, 칼데아 우르는 당시에 문화가 발달해 마치 오늘날 파리나 뉴욕에 견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에서 이별하라고 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없이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말씀 하나만을 굳게 믿고 하느님 명령대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다.
그의 기도는 철저히 순명의 기도이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순명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다 되지 않지만, 당신을 믿으니 당신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앙이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여정이라 했던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후 인생의 최고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성경 속 기도] (3) 아브라함의 기도 (하)
순명의 기도, 믿음의 삶
- 티치아노 작 ‘이사악의 희생’, 1542~154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출처=「명화로 만나는 성경」
아브라함은 네겝 지방에 살 때 기근이 들어 식구들과 함께 이집트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내려갔다. 이때 이집트 사람들에게 아내 사라이를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자칫 아름다운 사라이를 차지하려는 이집트인들 때문에 아브라함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창세 12,10-20). 그 후 아들과 같은 롯과 분쟁도 일어났다. 돈과 재물이란 것이 이상해서 하루아침에 인간관계를 파괴해버렸다(창세 13,1-18). 또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초조한 나머지 하가르를 소실로 들이기도 했다. 결국 하가르에게서 아들을 얻었지만, 본인과 아내 사라이, 하가르 모두에게 끔찍한 고통과 아픔의 삶이 되고 만다(창세 16,1-16).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으로 겪게 된 인생의 고비마다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 이때마다 그는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렸다.
아브라함 일생의 기도는 순명의 기도이다. 그는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실 때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한다. 물론 그의 삶에는 청원과 탄식의 기도도 있다(창세 18,16-33). 그의 신뢰 가득한 모든 기도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또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아브라함에게 질문하고 탄식하는 기도는 하느님 뜻을 찾고 하느님 신비를 느끼는 장이 된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마치 가까운 부모나 친지에게 드리는 대화처럼 친밀하다.
그런데 말년에 아들 이사악 때문에 받게 될 시련은 그동안 받은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어 이사악을 얻었다. 늦둥이로 얻은 이사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자식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그 어린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는 수없이 외치며 기도했을 것이다. “하느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가십시오.” 아마도 그는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아브라함 일생의 가장 큰 시련에서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갈등과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오면서 그는 한 가지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가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당장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기도의 삶이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시련과 시험의 연속이었으며, 그가 만난 하느님은 시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시련과 시험을 잘 감당해 마침내 하느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이 되었다. 믿음을 전제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 말씀에 먼저 순명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아브라함을 ‘신앙의 성조’(聖祖)라고 부르지만 그도 그저 약한 한 인간이며 신앙인이다. 신앙이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죄인인 채 하느님께 나가는 길이다. 중요한 건 언제 어느 때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다. 신앙인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렇게 낮고 간절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2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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