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9) “이국땅에 살면서”(집회서 머리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를 경외하라 사진에 보시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회당의 1893년 사진입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를 기려 그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는 기원후 1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되었을 때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당시에 로마군 지휘관이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가 그가 장차 황제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그때에 사람들이 모여 율법을 공부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남겨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다 파괴되는 마당에 그 작은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모든 것이 다 무너졌을 때 민족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언제 어느 곳에 흩어져 살게 되어도, 율법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 줄 것입니다. 집회서가 작성된 배경이 이와 유사합니다. 저자인 예수 벤 시라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히브리어로 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머리글에서 이 책의 취지를 밝혀 놓았습니다. “저는 이국땅에 살면서 배우기를 즐기고, 율법에 맞는 생활 습관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 책을 펴냅니다.” 그래서, 집회서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은 작성 연대가 명확합니다. 머리글에서 밝히듯이 할아버지의 책을 손자기 번역한 것이 기원전 130년대이므로, 책이 처음 작성된 것은 기원전 180년대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팔레스티나 본토를 떠나 이국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한창 꽃피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게 됩니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지던 때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요?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흐름에서도 이제 전환점이 필요했습니다. 잠언의 전통적 지혜에 욥기와 코헬렛이 이의를 제기한 다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이미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욥기와 코헬렛에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그 신비가 하느님의 영역이리라고 믿었다 하더라도,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갈망은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지혜를 찾는 시도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에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는, 지혜로운 분이 한 분 계시니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알려 주신다고 말합니다(집회 1,1. 8-10).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그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 그 지혜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인 지혜를, 하느님 편에서 나에게 주십니다. 그 통로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언제 어떻게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실까요?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집회서 24장입니다. 이 중요한 장에서는 먼저 지혜를 찬미한 다음, 그 지혜가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계약의 글이고 야곱의 회중의 상속 재산으로 모세가 우리에게 제정해 준 율법이다”(집회 24,23)라고 밝힙니다. 율법에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제는 멀리서 지혜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혜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지혜문학이 그동안 거쳐온 길을 돌아볼 때입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인간 이성이었습니다. 인간은 지혜를 찾아내고자 먼 여행을 했습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모두 가 보았습니다.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는 세상의 질서를 깨달아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멀리서 찾던 지혜는 실상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집회서 머리글에서 말하듯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율법과 예언서와 그 밖의 글들 곧 구약 성경 안에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민족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이성을 출발점으로 했던 지혜 추구가 이제는 다시 계시를 향하게 됩니다. 벤 시라의 시대에,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새로운 학문과 종교를 추종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찬란한 지혜를 이루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욥기, 코헬렛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이미 그러한 시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고 어디에서 멈추게 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집회서는,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 있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없이 인간의 지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잠언 첫 장에서 말했듯이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것이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준칙이 되었던 것입니다. 벤 시라는 모든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을 통하여 위대한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많이 전해졌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후손들에게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로마제국에 무너진 민족을 다시 세우려 하였듯이, 벤 시라는 하느님의 지혜가 담긴 율법을 통하여 이국땅에 사는 이스라엘 후손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려 하였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6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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