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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소돔과 고모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7 조회수8,797 추천수1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소돔과 고모라

 

 

소돔과 고모라는 일반적으로 동성애에 얽힌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의 영향으로 미국에는 한때 ‘소돔 법’이라는 동성애 금지 조항이 있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동성애자들을 ‘소돔인’이나 ‘고모라인’이라고 일컫는다. 선천적 이유로 동성애자가 된 이들도 있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이렇게 미국 법에 자취를 남겼고, 근대 문학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타락의 대명사처럼 인용되고 회자되었다(이사1,10; 에제 16,49; 마태 11,24; 유다 7절 등 참조).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 행위만으로 망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다운 자비심을 잃은 채 폭력을 휘두르고, 그에 대한 회개가 없었던 탓이 훨씬 컸다. 이번 호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몰락한 원인과 그 이야기 안에 숨겨진 메시지들과 교훈을 살펴보려고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성경에서 맨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 10,19이다. 이야기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해서이다. 아브라함과 롯은 각자의 식솔을 거느리고 다 같이 살았지만, 식구가 너무 많아 함께 살 수 없게 되자 분가를 결정했다(창세 13장 참조). 당시에는 반 유목생활을 했기에, 가축에게 풀을 먹일 수 있는 풀밭이 모자라면 대가족이 모여 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량을 베풀어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었고, 롯은 물이 풍부하고 하느님의 동산처럼 보이는 소돔을 택하였다(창세 13,10.12 참조). 그곳에는 샘이 있어, 척박한 주변에 비해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성읍은 타락했다. 롯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창세 13,13 참조), 경제적 이점만 생각하여 소돔에 정착하였다. 소돔 사람들이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은 방종으로 보인다. 신명 32,15과 잠언 30,8-9의 말씀처럼 지나치게 안락한 삶은 하느님을 망각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돔의 죄악

 

헤브론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천사들(창세 18,1-15)은 소돔의 타락상을 살피려고 직접 그곳으로 들어간다(18,20-22; 19,1). 그들이 롯의 집에 머무는 동안, 소돔 주민들은 손님들에게 타락 행위를 하려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19,5). 이는 약육강식하는 폭력이 소돔에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성애도 금지된 행위였지만, 나그네를 강압적으로 범하려한 폭력만으로도 마을의 부패된 정도를 가늠할 수가 있다.

 

소돔의 죄악은 이 사건에만 암시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주민들 사이에 암암리에 약자를 수탈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 18,20-21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라는 말과, 19,13의 “저들에 대한 원성”이라는 말은 소돔인들과 고모라인들이 가난한 이를 억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원성’으로 옮긴 히브리어 ‘제아카’는 성경에 ‘부르짖음’으로도 번역되었는데, 이는 핍박받거나 곤경에 빠진 이들이 도움을 청할 때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이다(탈출 2,23 :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22,22 :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등 참조).

 

에제 16,49의 기록에서도 소돔이 약자들을 착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소돔과 그 딸들은 교만을 부리며, 풍부한 양식을 가지고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면서도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손을 거들어주지 않았다.” 참조). 곧 이 모든 죄악이 총체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의 심판(창세 19,24)을 불러왔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에 대비되는 정의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이는 롯과 그의 두 딸들뿐이었다. 하지만 롯이 구제받은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아브라함의 중재기도 덕분이었다. 아브라함을 보아(창세 19,29)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19,16).

 

여기서 흠 없고 도덕적인 이의 중재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인품은 천사들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초청했을 때는 곧바로 받아들인 그들이었지만(18,2-5), 롯이 자기 집으로 청했을 때는 ‘광장에서 밤을 지새우겠다.’는 말로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했다(19,2-3). 아브라함은 멸망을 앞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지만(18,16-33), 롯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위해 처녀인 딸까지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19,8).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고자 하느님도 설득한 아브라함과 달리(18,23-32), 롯은 손님들을 해하려고 몰려든 이웃은 물론, 소돔의 멸망 예고를 듣고도 제 가족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19,7-9.14). 그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한 아브라함과 달리, 롯은 제 목숨에만 관심이 있었다(19,20).

 

롯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악한 성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멸망 직전에 천사들이 망설이는 그의 손을 잡고 끌어내주어야 했다(19,15-16). 게다가 뒤에 이어지는 롯의 숙취와 근친상간(19,30-38)은 그와 가족들이 자신들의 정의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거듭 암시해준다. 롯이 소돔에 정착하게 된 건 한마디로 유유상종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로 추정되는 남(南)사해

 

사해는 성경에 ‘동쪽 바다’ 또는 ‘아라바 호수’ 등으로 나온다(신명 3,17; 즈카 14,8 등). 염도가 다른 바다에 비해 세 배 이상 높아 ‘소금 바다’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창세 14,3; 민수 34,3 등). 사해에 소금이 많은 이유는 고도가 낮기 때문이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요르단 강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해저 400미터인 사해에 이르면 흐르지 못하고 고인다. 더욱이 사해 주변은 예로부터 지각 작용이 활발하여 유황 성분이 많았다. 본디 얕은 바다였다가 육지로 바뀐 곳이다. 플랑크톤이나 조개껍데기가 뭉쳐져 만들어진 석회암이 많은 것도 사해 주변이 처음에는 모두 얕은 바다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해도 단층작용으로 바닷물이 가장 낮은 지점에 모이면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그 뒤 소금과 유황 등이 물과 함께 쓸려와 사해에 쌓이고, 뜨겁고 건조한 기후 속에 끊임없이 증발이 일어나 농도가 짙어졌다. 사해는 소금 덕에 썩지는 않으나, 다만 생명체가 살기 어려울 따름이다. 현재는 수위가 많이 내려가서 북(北)사해와 남(南)사해로 나뉘었다. 소돔과 고모라로 추정되는 곳은 남사해 부근이다.

 

특히 사해 남동쪽(현재 요르단 땅)은 다른 지역보다 물이 풍부해, 성읍이 세워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임금이 참전했다는 아브라함의 전쟁 이야기에는 역청 수렁이 많은 ‘시띰 골짜기’가 언급되는데(창세 14,3.10), 지금도 남사해 연안에는 상당한 양의 역청이 나온다. 게다가 창세 14,3은 ‘시띰 골짜기’를 ‘소금 바다’라 불러 그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소금(소돔) 산지.

 

 

전승에서 ‘소돔 산’이라 불리는 곳도 남사해에 있다(왼쪽 사진 참조). 유황불이 터질 당시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창세 19,26도 이곳에서는 매우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토양 대부분이 소금돌, 곧 암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디 사해 바닥에 깔려 있던 땅이 압력에 밀려 밖으로 나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질을 갖게 되었다. 곧 바다 밑이 바깥으로 밀려나올 때, 물은 증발하고 암염으로만 남은 것이다.

 

 

유황불에 멸망하다

 

그렇다면 유황불로 망했다는 소돔과 고모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해와 그 주변의 광야는 지금도 유명한 지진대에 속한다. 장장 6천 킬로미터로 시리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긴 단층의 일부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사해가 형성된 것도 태곳적 발생한 지각 활동 때문이었다.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도 지진이 거세게 발생하지 않았을까? 지각 일부가 열림으로써 아래에 억눌린 유황과 가스 불이 터지고, 큰 화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소돔보다 북쪽인 헤브론에 있었기에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소돔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던 ’장면(창세 19,28)을 볼 수 있었다.

 

 

회개가 없던 성읍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허망하게 멸망해 버린 것은 죄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개가 없었던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니네베도 재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참회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요나 3장 참조).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회개의 촉구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뒤틀림이 심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악덕으로 여겨진 일들이 거듭되면서 무의식 중에 일상으로 둔감해지는, 그런 도덕 불감증이 소돔과 고모라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도덕이 밥 먹여주냐?’는 말이 돌았던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소돔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경제적 이점만 생각해 정착했다가 재난을 겪은 롯처럼 말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닐뿐더러, 진정 도덕이 밥 먹여준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사기와 폭력, 억압이 판치는 사회는 오염된 물과 그 속의 물고기처럼 서서히 죽어간다는 진리를 잊은 채 사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심리와 같이 말이다.

 

 

소금으로 닦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몰락하고 이제 바닷물과 소금 산만 남았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감싸 안은 사해는 오랜 세월 동안 썩지 않았다. 자비심도 회개도 없던 성읍을 소금으로 닦으려 하신 조물주의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그래서 사해에서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마태 5,13-15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썩지 않도록,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그런 역할을 하라는 뜻이 아닌가?

 

삼라만상에 이롭지 못한 요소는 토해버리는 대자연의 규칙 아래 우리는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사해는 자극적 쾌락에 굴복하거나 물질적 풍요에 자만하지 말라고, 인간다운 자비심과 도덕적 경각심을 잃지 말라고 조언해 준다.

 

그래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견제하는 소금이 되라고 말이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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