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지도자들]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지도자 야곱 대부분 위대한 지도자는 탄생과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겪는다.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배 속에서부터 쌍둥이 형인 에사우와 경쟁을 했다. 야곱은 이름대로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지만, 에사우와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 상속권을 뺏는다.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던 야곱은 젊어서는 거짓말쟁이였다. 결국 자신의 거짓말을 뉘우치고 형에게 사과했다. 형과 화해하는 장면은, 결점 많은 인간이 윤리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야곱의 잘못과 도망 정치경제 지도자들은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현실적 상황에,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것 때문에 큰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당장은 거짓말이 먹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난 뒤, 그 몇 배로 당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차고 넘치게 찾아볼 수 있다. 형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야곱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에사우가 자신의 권리를 대신 꿰찬 아우를 죽이겠다고 결심했고, 야곱을 몹시 사랑한 어머니 레베카가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야곱과 에사우를 키우는 레베카의 방식이 건강해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야곱이 어머니를 떠나, 진정한 남자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요즘은 자식잘 키웠다고 ‘장한 어머니상’을 주기도 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자식의 성공을 어머니의 희생과 연결시키면 어머니가 자식의 일에 지나치게 개입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고, 오히려 자녀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야곱 또한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레베카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 뒤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심에 눈먼 어머니의 치마 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응석받이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는 없다. 길 떠난 야곱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하늘로 올라가는 층계를 보는 환시의 경험이다. 만일 주변에서 누군가 이와 비슷하게 황홀한 체험을 했다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하겠지만, 구약시대에는 추호도 의심없이 야곱의 환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층계의 계단 하나하나가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유형지의 고통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언뜻 하늘에 닿아있는 층계는 영광스러운 일들만 눈앞에 펼쳐질 것 같은 비유로 읽어내기 쉽다. 구약성경은 이와같은 잘못된 해석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유가 된다. 층계를 타고 남보다 높이 서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현대인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남보다 성공하고, 남보다 많이 가지는 것만 추구한다면 결국 정점에서 사라지거나 떨어질 일만 남게 된다. 야곱의 차별적 태도 야곱은 사촌 라헬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7년간 대가없이 일을 해준다. 드디어 7년 만에 라헬과 결혼하는 줄 알고 좋아했으나 장인이 야곱을 속여 언니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낸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과거가 있는 야곱이 이번에는 장인에게 속은 것이다. 좋아하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을 더 일했고, 좋아하지도 않는 레아에게서 아이를 연거푸 낳게 된다. 호불호가 분명한 야곱이 또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다. 사람은 도덕성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많은 투자를 해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런 차별적 태도를 지도자가 갖고 있다면 공동체는 많은 갈등과 분열 끝에 붕괴되고 만다. 권력자가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한없는 부와 특혜를 주고,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한다면, 그 조직이나 국가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라헬과 레아를 차별한 야곱에게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자식 탄생의 순서는 야곱에게는 큰 약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라헬의 행동이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딸보다는 야곱의 아내로 행동해서 라반 가문의 보물을 갖고 떠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그리고 서동요 설화와 비슷하다. 여성들 또한 영웅으로 거듭나려면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실질적인 교훈이고, 무의식에 있는 낡은 남성성, 곧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는 ‘아니무스 콤플렉스’(남성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여성의 심리)를 버리라는 뜻이다. 야곱의 불안과 걱정 야곱이 식구들을 데리고 형인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길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생긴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했는데,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다치게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고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으니(호세아서에서는 천사와 겨룸)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야곱은 하느님의 얼굴을 뵌 곳이라 해서 그곳을 프니엘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애초에 천사나 하느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다만, 야곱이 그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이런 심리적 상황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찾아온다. 지난날로 돌아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더라면 하는 식으로 시간까지 초월하고 싶은 감정과 자신의 이성이 온 우주를 다 이해하여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무시하는 태도. 이와 같은 것들이 아마도 천사를 이길 수 있으리라 착각한 야곱의 태도와 비슷한 것이다. 여러 가지 고난 끝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야곱은 형 에사우의 큰 분노가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을 죽일까봐 걱정했을 것이고, 아버지 이사악이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지 불안해 할 수도 있었다.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힘을 겨룬 것은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잘 이겨내라는 훈련인 셈이었는데, 야곱은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축복을 받았다는 것으로 안심했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체험은 평범한 우리에게도 자주 찾아온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종교적 체험을 한 뒤, 한결 성장하고 변화된 태도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야곱의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에사우와 잘 화해하고, 야곱은 스켐 마을에 자리 잡고 산다. 하지만 딸 디나가 지방 군주의 아들에게 겁탈당한 뒤, 야곱의 아들들과 스켐 사람들 사이에는 큰 싸움이 일어난다. 역시 꾀쟁이 야곱의 아들들답게 결혼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꾀여서 아파하는 군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아버린다. 의기양양한 아들들 앞에서 야곱은 가나안 사람과 프리즈인들이 자신들을 치러 올 것이라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하느님의 명에 따라 베텔로 돌아간다. 야곱은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던 그곳에 석상을 세우고 돌기둥 위에 술과 기름을 붓는 종교적 의식을 치르게 된다. 라헬이 요셉의 동생 벤야민을 낳다가 죽어 베들레헴에 묻힌다. 베텔이 뒤에 북부 지파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성장하는 지도자 도덕적으로 야곱은 크게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가 아니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처음에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거듭되는 시련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야곱은 의미심장한 여러 교훈을 우리에게 남긴다. 무엇보다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딛고 거듭나는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많은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원칙이니 초심이니 하는 포장에 머물 뿐 성숙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거부한다. 대다수의 지도자는 많은 사람이 지도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외골수가 되어 흉한 모습으로 생을 마친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금씩 성장하며 진정한 지도자로 변화되는 야곱을 닮아가는 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5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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