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지도자들] 용서하고 아우르는 지도자 요셉 인천공항에는 지금도 시리아 난민들이 유리창도 없는 방에서 햄버거와 콜라만 먹으며 사실상 감금된 채 산다. 전쟁을 피해서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숙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난민 가운데 테러범이 있을 가능성 때문에 죄 없는 생명들이 바다에 빠지고, 굶어 죽는다. 물론 불법 체류자와 이주 노동자들 때문에 손해본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정부가 무조건 두 팔 벌려 난민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강제로 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난민 국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을 견디지 못해 만주나 러시아 등으로 봇짐 하나 들고 하염없이 떠났다. 육이오동란 때에는 생존 그 자체 때문에 포탄을 피해 정든 집과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등져야 했다. 군사독재 때에는 또 어땠는가? 고문과 감금 같은 정치적 탄압을 못 이기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도 많다. 우리나라도 이제 살 만해져서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할 처지이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적지 않다. 악명 높은 관타나모 수용소(쿠바에 있는 미해군기지)보다 우리의 출입국 심사가 그래도 좀 나을까? 이런 상황에서 창세기의 마지막 주인공인 요셉을 본다. 그도 노예이자 난민 출신이지만 나중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배반당한 뒤,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또한 앞날을 내다보고 국가의 힘든 시기를 견디어 냈으며, 지혜와 추진력뿐 아니라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악한 형제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지도자 요셉은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뺏겼다고 생각한 이복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시기심을 알지 못하는 순진한 요셉은 꿈 이야기를 해서 더 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요셉이 등장하는 창세기의 꿈들은 특히 분석심리 학자들이 여러 번 언급할 정도로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먼저 형들의 곡식이 자신의 곡식에게 절하는 꿈과, 아버지인 태양과 어머니인 달 그리고 형제들인 열한 개의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부터 보자. 아직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하고 앞으로 어떤 능력을 갖게 될지 알지 못하는 순진한 요셉에게 무의식은 사실 엄청난 진실을 예고한다. 영악한 형들은 이런 꿈의 내용을 눈치 채고 요셉을 죽이려고 한다. 요셉을 불쌍하게 생각한 르우벤이 목숨만은 살려주자며 요셉을 죽이는 대신 빈 구덩이에 넣는다. 그러나 르우벤이 안 보는 사이에 낙타를 탄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넘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고 둘러댄다.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의 개인 노예가 되었고, 그의 부인의 유혹을 거절하자 강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으로 잡혀온 임금의 술 시종장과 빵 굽는 시종장의 꿈풀이를 해준다. 요셉의 꿈풀이대로 되자, 시종장의 소개로 파라오의 꿈도 풀이해 주게 된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밀대 하나에서 좋은 이삭 일곱이 나와 여물어갔는데 뒤이어 돋아난 일곱 이삭은 바싹 말라서 좋은 일곱 이삭까지 삼켜버렸다. 또 살지고 잘 생긴 암소 일곱 마리가 나중에 나타난 마르고 못생긴 일곱 마리 암소에게 잡아먹혔다’(41,14-24 참조). 요셉은 이 꿈을 듣고 칠 년 동안 대풍이 왔다가 다시 칠 년 동안 흉년이 올 것이니 곡식을 저장하라고 조언한다. 요셉의 지혜에 감탄한 파라오는 그를 통치자로 임명한다. 실제로 칠 년의 대풍년 뒤에 찾아온 칠 년의 기근을 버틸 수 있었다. 용서하는 지도자 한편 이웃 나라들과 함께 이스라엘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야곱은 요셉의 형들을 이집트로 보내 식량을 사오라 하였다. 요셉은 자기를 찾아온 형들을 금방 알아보았지만, 염탐꾼이 아니냐며 감옥에 가둔 뒤 한 명만 인질로 잡아두고 막내 동생인 벤야민을 데려오라고 명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자루에 자신들이 낸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보고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당황한 아버지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인 벤야민을 내줄 수 없다고 하였다. 요셉은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형들이 자신에게 한 짓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를 준 셈이다. 기근이 계속되자 결국 형제들은 요셉을 다시 찾아온다. 이번에도 요셉은 벤야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 그들을 죄인으로 몰고 간다. 이런 시험 뒤에 형들을 용서하고 이집트에 정착시키려 하는 일종의 준비 단계인 셈이다. 요셉은 자신의 가족을 이집트에 잘 정착시키고 백열 살까지 장수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영웅담의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 지위가 불안정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시기하는 이복형제들의 함정에 빠지고 고향을 등진다.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도 주몽과 온조, 그리고 비류 이야기가 있다.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와 민담 ‘장화홍련’도 형제들의 시기와 견제로 고향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요셉이 고향을 떠나 구덩이에 빠지고, 감옥에 갇혔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마침내 가족을 용서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하다. 요셉의 역경은 예수님의 탄생과 고초 그리고 부활을 미리 준비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이 부모와 헤어지는 사건은 뒤에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홀로 성전에 남아, 학자들과 지내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고향을 떠난 요셉이 겪는 고초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는 예수님의 상황과 연결된다. 요셉이 자신을 죽음의 위험으로 몰아간 형제들을 용서한 장면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당신을 판 유다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정한 베드로를 배제하지 않으신 채 제자들을 모두 축복하시고 자신의 피와 살을 받아마시라고 하신 대목에서 완성된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을 모함하는 정적과 자신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잔소리꾼들과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이들까지 아우르는 사람이다. 정이 있는 지도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다시 제자들을 만나 축복해 주셨고, 요셉은 살아서 가족과 다시 만나 가족에게 돌아간다. 요셉을 죽인 벌을 받고 있다고 자기들끼리 떠들 때와 이집트로 다시 돌아온 형들과 만났을 때, 요셉이 몰래 우는 장면은 요즘의 영혼 없는 지도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목이다. 지위가 올라가고 힘이 커질수록 본디 가졌던 따뜻한 공감 능력은 사라지고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무시한다. 훌륭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괜찮은 교육도 받고,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 모두 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성취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며, 몇 백 배 보상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끊임없이 파벌을 만들고, 원한 갚을 궁리와 이익만 계산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지도자라면 개인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 사이를 가르며 증오를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요셉 같은 지도자의 모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6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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