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제3이사야는? 제3이사야서(이사 56-66장)의 저자는 누구일까? 이와 같은 물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제2이사야 예언자의 제자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사 56-66장을 쓴 제3이사야는 이사 40-55장을 쓴 제2이사야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제3이사야 시대의 유다왕국은? 많은 유다 백성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옛 유다왕국의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50여 년간 버려져있던 성읍들과 도시들은 문자 그대로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 예루살렘 도심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됩니다. 민족의 정치 지도층은 물론 종교적 몰락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이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유다민족은 한마디로 위기에 빠집니다. 유다민족이 맞은 위기는? 민족 지도자들이 다 바빌론으로 끌려가버려 유배가 끝난 다음에도 유다왕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층이 구조적으로 아예 없어진 것입니다. 곧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중심축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에 민족이나 국가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으니 한 나라에 그보다 더 큰 위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작은 마을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유다왕국을 이끌 국가 지도자들의 부재 곧, 국가 공적 권력과 기관뿐 아니라 유다교를 이끌고 나갈 정신적, 내적, 영적 지도자까지 찾기 힘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참상을 전해주는 구절은? 다음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듯 당시 폐허가 된 유다왕국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저희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하던 곳, 저희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집은 불에 타 버렸고 저희에게 보배로운 것들은 모두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64,9-10) 유다인들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우리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위기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한밤중은 쉬지 않고 저 멀리서부터 밝아오는 새아침으로 향합니다. 바빌론 유배지에는 벌써부터 주님 구원의 손길을 선포하면서 끊임없이 새 희망을 안겨주었던 제2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예고대로, 시간을 흘러 역사는 바뀌게 됩니다. 역사는? 흘러가면서 바뀝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이제 새로운 패자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가 중동의 패권을 차지합니다. 덕분에 유다는 해방 곧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기원전 587년) 꼭 50년 만인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 칙령으로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귀환 장면을 담은 구절은? 다음에서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그것들을 꺼내 오게 한 다음, 낱낱이 세어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그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가 서른 개, 은 접시가 천 개, 칼이 스물아홉 자루, 금 대접이 서른 개, 이급 은 대접이 사백열 개, 그밖에 다른 기물이 천 개였다. 그리하여 금 기물과 은 기물은 모두 오천사백 개였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에즈 1,8-11)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 집의 금은 기물들을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꺼내어 바빌론 신전으로 가져갔는데, 키루스 임금님께서 그것들을 바빌론 신전에서 꺼내시고, 지방관으로 임명하신 세스바차르라는 이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스바차르에게, 그 기물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또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에즈 5,14-15) 이어지는 구절은 그렇게 유리한 여건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전공사가 깔끔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엿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스바차르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 집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어왔지만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에즈 5,16) 유다인들의 움직임은? 많은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시도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66,1)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너의 성벽을 쌓고 그들의 임금들이 너에게 시중들리니…… .”(60,10) 제3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20년 전까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지부지 끌어오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 공사가 기원전 520년에 이르러 제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3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예루살렘 부근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공사가 활발히 진행될 무렵까지 활동했다고 봅니다. 유배에서 귀향한 유다인들은? “온 회중의 수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의 남녀종이……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다다랐을 때,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 쓸 자원 예물을 바쳤다. 저마다 힘닿는 대로 공사 금고에 바치니, 금화가 육만 천 드라크마, 은화가 오천 미나, 사제 예복이 백 벌이나 되었다.”(에즈 2,64-69) 에즈라는 이어서 당시 상황을 전해줍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백성 일부는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성가대와 문지기들과 성전 막일꾼들은 저마다 제 성읍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도 제 성읍에 자리를 잡았다.”(에즈 2,70) 바빌론 유배 후 유다인들의 삶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꼽을 이들은 바빌론으로 유배가지 않고 유다 땅에 그대로 남아있던 이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야훼신앙을 견고히 지키며 살아온 정통 유다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형태의 잡신공경에 빠져있었습니다. 유다 땅에 사는 두 번째 부류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다, 시므온, 벤야민 지파 출신 유다인들로서 야훼 하느님 신앙에 열정을 지니고 귀향했지만 폐허가 된 본국의 모습 속에서 여러 내외적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본국에 그대로 남아있던 유다인들이 잡신공경 등에 빠져있는 모습, 곧 그들의 배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종교적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속적으로 그냥 쉽게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7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제3이사야의 신학? 유다 땅에 사는 세 번째 부류는?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일자리를 찾아서든 또 다른 이유에서든 유다 땅에 와서 자리 잡고 살게 된 외국인들입니다. 거기에다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유다인들과 더불어 유다 땅으로 이주해온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외국인들이 야훼 하느님을 믿으며 율법과 독특한 종교관습을 따르는 유다인들과 얼마나 동화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유다인들의 네 번째 부류는? 그들은 유다 땅 밖에서 살아가는 이른바 디아스포라 유다인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하면서도 그들은 늘 자신의 조국을 <야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으로> 바라보면서 성지를 그리며 그곳에 갈 날을 희망합니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시편 137,4-6)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귀향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쫓겨 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미 모아들여진 이들 말고도 다시 더 모아들이리라.’”(이사 56,8) 제3이사야의 과제는? 예언자가 우선적으로 할 과제는 이들 네 부류의 유다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들 네 부류가 상호간 불협화음을 최소화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일이 제일 큰 과제였습니다. 예언자는 유배지에서 큰 희망을 안고 돌아온 이들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제2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이 아직 오지 않고 있기에 더더욱 백성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하여 사방이 폐허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의에 차 있었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예언자의 다음 과제는? 특히 귀향자들과 본국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 나아가 그들 사이에 골이 깊어져가는 미움과 분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을 무슨 말과 어떤 행동으로 위로하며 어떻게 그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것인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형태의 신앙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도 다음으로 큰 과제였습니다. 유다 땅으로 이주해 와서 사는 외국인들과의 갈등해소도 해결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제3이사야가 선택한 문제해결 방안은?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정의와 공정을 실천할 것을 주문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이사 56,1) 당시 하느님 백성이 서로 주고받던 한탄의 소리를 들어봅니다. “그러므로 공정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정의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이사 59,9)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제3이사야가 막 예언 활동을 시작할 때의 상황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제3이사야는 미래에 대한 큰 꿈과 기대 속에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향했지만 오히려 좌절과 실망 속에 허덕이는 유다사회를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분석합니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59,1-2) 제3이사야의 외침은? 한마디로 밖에서 구원이 찾아오기를 그저 기다리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라는 주문입니다. 더 쉬운 말로 ‘회개하라,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입니다. 제3이사야의 외침을 직접 들어봅니다. “정녕 저희 악행이 당신 앞에 많고 저희 죄가 저희를 거슬러 증언합니다. 참으로 저희 악행이 저희와 함께 있고 저희 죄를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였습니다. 저희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억압과 반항을 이야기하였으며 거짓말을 품었다가 마음속에서부터 내뱉었습니다.”(59,12-13) 제3이사야가 말하는 참행복은? 우리는 제3이사야의 참행복 곧 행복론을 다음 구절에서 엿보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이(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이를 준수하는 인간,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는 이,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이.”(56,2) 제3이사야의 눈에 거스르는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예언자는 참회예절이나 금식행사를 이끌어가면서도 속마음은 잿밥에 가있는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표현까지 퍼부어가며 나무랍니다. “그(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모두 눈이 먼 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모두 벙어리 개들 짖지도 못하는 것들. 드러누워 꿈이나 꾸고 졸기나 좋아하는 자들이다. 게걸스러운 개들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 목자라는 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한다. 모두 제 길만 쫓아가고 저마다 예외 없이 제 이익만 쫓아간다.”(56,10-11) 제3이사야가 지적하는 지도자들의 부패상은? 한편으로는 지도자들의 직무유기를 꾸짖습니다. 요즈음 표현으로 ‘공직자로서’ 백성에게 닥쳐올 재앙이나 재난을 일찌감치 내다보고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러한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지도자들이 하느님 뜻에 따라 공동선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데,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질책합니다. 이렇게 ‘부패한 공직자들은’ 결국 눈먼 파수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둑이나 낯선 이를 보고 입을 가지고도 멍멍 짖지 못하는 개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제3이사야는? 부패한 지도자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그려줍니다. “오너라. 내가 술을 가져올 터이니 우리 독한 것으로 마시자.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니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56,12)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아직 자리 잡지도 못한 채 수많은 이들이 한편에서 굶주리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이 가련한 백성을 살찌울 책임을 맡은 공직자들이 하고 한날 술판이나 벌이고 있음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구절입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사회 정의와 공정이 펼쳐질 수가 없습니다. 제3예언자는 지도자들만 나무랍니까? 아닙니다. 그는 사회정의와 공정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책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4,4-5)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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