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엘로힘
구약성경 주인공의 이름으로 유일하신 하느님 뜻해 히브리어의 첫 글자는 알레프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곧 하느님의 이름은 알레프로 시작했다. “엘로힘”은 구약성경의 주인공의 이름이자, 믿음의 대상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낱말이기도 하다. 익숙하지만 낯선 말 이 엘로힘이라는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어떤 본당에는 ‘엘로힘 성가대’ 등의 단체도 있고, 건물의 이름에도 있다. 개신교에서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본디 ‘복수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복수형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그리스도교는 유일신교 아닌가? 하느님은 한 분인데, 왜 그 분을 부르는데 하필 복수형의 낱말을 썼을까? 그런데 바로 이 점을 아는 것이 구약성경 히브리어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 엘로힘.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오른쪽 끝의 알레프와 왼쪽끝의 남성복수형 어미 ‘임’이 선명하다. 단수형과 다른 복수형 복수형은 그저 ‘많음’ 또는 ‘다수’를 의미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때때로 ‘더 큰’ 또는 ‘더 높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복수형의 용법인데, 우리말은 단수형과 복수형을 뚜렷이 가르는 언어가 아니라서 이런 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비교적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나 독일어에서 (개인인)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복수형을 쓴다. ‘너’(tu, du)라고 하지 않고 ‘너희들’(vous, Sie)이라고 함으로써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대개 사회적 신분이 높은 대상에게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이 기원이다. 원래 영어에서도 ‘너’(thou)와 ‘너희들’(you)을 구분했는데, 이 경우는 경칭만이 살아남았다. 이런 복수형을 ‘존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라고 한다. 하느님은 높으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복수형의 이런 용법을 하느님께 드렸다. “신들”(엘로힘)이라고 쓰고 “신”(하느님)이라고 읽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한결같이 이 복수형으로 유일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름은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가장 높으신 신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때, “신들의 신”(신명 10,17; 시편 136,2)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엘로힘의 엘로힘”이 된다. 일종의 말놀이로 볼 수도 있는 이런 표현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신들(엘로힘)을 뛰어넘는 유일하신 하느님(엘로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 아도나이. 일관되게 복수형으로 쓰였다. 아도나이도 복수형이다 구약성경 하느님의 호칭 가운데 역시 알레프로 시작하는 이름이 있다. ‘나의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이다. 그런데 이 말도 역시 복수형이다.(단수형은 ‘아도니’이다). ‘나의 주님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쓰고 ‘나의 주님’이라고 단수형으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존엄의 복수형으로 하느님을 부른다. 욥기의 근본적 성찰 그렇다면 엘로힘의 단수형은 무엇일까? ‘엘로-하’이다. 특이하게도 욥기는 하느님을 이렇게 부른다. 엘로하로 하느님을 부르는 본문은 대부분 욥기에 몰려 있다. 욥기는 근본적으로 깊고 새롭게 성찰하여 깊은 지혜를 끌어올리는 책으로 유명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다시 헤집으며 하느님, 믿음, 고통, 정의, 창조, 구원 등의 주제를 완전히 새롭게 성찰하는 책이다. 욥기의 이런 성격은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호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존에 널리 사용하던 하느님의 존엄한 이름보다, 그저 ‘신’이라는, 본래의 더 소박한 이름을 두고 하느님과 솔직히 겨루려는 욥의 기개가 느껴진다. - 엘로하. 하느님을 단수형으로 쓴 이름이다. 하필 ‘-임’이라는 어미 히브리어의 남성 복수형 어미는 ‘-임’이다. 한국인인 필자는 하느님의 이름이 하필 ‘임’으로 끝나는 점이 새삼스럽다. ‘하느ㄴ-임’과 ‘엘로ㅎ-임’의 각운이 일치하는 것은 그저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이나 히브리어로 그분을 모두 ‘님’으로 부를 수 있으니 이 또한 우리 민족에 내리신 은총 아닌가.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근동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0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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