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 정화하시며 당신 죽음과 부활 예고 -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며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엘 그레코 작 ‘성전정화’ 부분, 1600년대, 프릭 컬렉션, 미국 뉴욕. 복음서는 모두 넷입니다. 그중에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공관(共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관이라는 말은 18세기에 세 복음서를 비교할 수 있게 편찬한 책의 이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를 바라보는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으로 소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 니다. 갈릴래아 주변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여정이 끝나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장소라는 점에서 공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구원을 위한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공관 복음은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예루살렘에 가신 것처럼 묘사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의 삶 전체는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공관 복음과 차이가 있지만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성전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요한 2,13; 5,1; 7,14; 12,12).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2년 남짓한 공생활의 시간을 보내셨다면, 성전에 한 번 방문했다고 전하는 공관 복음보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좀 더 정확해 보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성전을 정화한 예수님에 대한 언급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했을 때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요한 복음은 자신의 복음서 초반에, 그리고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 바로 직전에 소개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 여정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성전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언제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서 전하는 내용이 개연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 성전 정화 사건에서 시작해서 점차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을 정화한 이야기의 내용은 거의 동일합니다. 공관 복음은 모두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이사야서(56,7)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예레미야서(7,11)의 내용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언급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제자들에게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는 시편 69장 10절의 내용을 기억하게 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로 답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이 말씀의 의미를, 곧 당신의 부활을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결국, 이러한 내용을 기록한 것은 죽음과 부활 이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명확하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과 부활과 무관하게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들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이런 방식을 학자들은 재독(再讀, Relecture)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죽음과 부활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 역시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31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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