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예레미야서의 주요 신학은? 예레미야서의 하느님 ‘예레미야의 신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라보는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온 누리의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이시므로 인간은 그분께 충성을 다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구원의 원천이신데 인간이 그분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예언자는 고발합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2,13) 예레미야의 지적 능력은?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거기서 벌어지는 일의 상징적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이때 예언자에게는 아무런 주도권도 없으며 나아가 그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합니다(18,1-5 참조). 옹기장이와 옹기그릇, 주님께서 깨우쳐주시는 내용은? 옹기장이는 자신이 만드는 옹기그릇의 주인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형체로 나오지 않는 옹기그릇은 즉시 깨뜨려버리고 다시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도 모든 피조물에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여 당신 백성을 만드실 수도 없애실 수도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인간이, 마치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 꼴로 만들었느냐?’고 대들 수 없듯이, 자신의 주인이신 주님께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혼인한 남편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2,2) “눈을 들어 벌거벗은 언덕들을 보아라. 네가 더럽히지 않은 자리가 있느냐? 광야에 사는 아라비아인처럼 너는 길가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고 불륜과 악행으로 땅을 더럽혔다. 그리하여 소나기가 거두어지고 봄비도 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탕녀의 이마를 하고 부끄러워하기를 마다한다.”(3,2-3)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은? 친족 관계의 계약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파기하지 않으시는 반면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간음이나 배신을 통하여 그분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새 계약)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31,31-32)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계약’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옛 계약을 파기한 죄(31,32)를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주시고 나서 다시금 체결해주실 ‘새 계약’은 시나이 산에서 내려주신 계명을 수정하거나 변경하여 새롭게 내려주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계약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컫는 새 계약은 그 옛날 내려주신 계명과 맹세가 인간 내면 깊숙이 새겨져 자리 잡게 되는 계약입니다. 이에 도움을 줄 표현 몇 가지를 꼽는다면?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4-6)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이끌어 데려 가련만. 당신에게 향료 섞인 술, 나의 석류주를 대접하련만.”(아가 8,2)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이사 48,17)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이사 55,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2)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도 있는 하느님’입니다. 이는 설사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선다고 해도 그분께서는 자신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리라고 굳게 믿었던 유다 지도층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는 사상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기득권 세력은 늘 하느님께서는 자기들 편으로 남아 계시리라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대 안전하다고 온 백성을 부추기면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곧 그대로 가면 하느님께서 자비를 거두시어 이스라엘을 포기하실 수도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포기 선포는? 다음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너는 맨발이 되지 않도록 네 발을 보살피고 목마르지 않도록 네 목을 보살펴라. 그러나 너는 ‘안 돼요. 어쩔 수 없네요. 낯선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네들을 따라다니겠어요.’ 하고 말하였다. 도둑이 붙잡혀 수치를 당하듯 이스라엘 집안이 수치를 당하리라. 그들과 그 임금들과 제후들,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수치를 당하리라.”(2,25-26) “그날에……. 임금이 용기를 잃고 제후들도 용기를 잃으리라. 사제들이 깜짝 놀라고 예언자들도 아연실색하리라.”(4,9)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시는 이유는? 다음 구절이 답을 줍니다. “너희의 죄악이 이런 질서를 어지럽혔고 너희의 범죄가 너희 선익을 가로막았다. 내 백성 가운데 사악한 자들이 있어 들새 사냥꾼처럼 숨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그물을 쳐놓고 사람들을 잡는다. 새들로 가득 찬 바구니처럼 그들의 집안은 사기 쳐 얻은 재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득세하고 부유해졌으며 기름기로 번들거린다. 그들은 악한 행실도 서슴지 않으니 고아들이 승소할 수 있도록 그 송사를 공정으로 다루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재판을 올바로 진행하지 않는다. 이런 짓을 보고서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이따위 민족에게 내가 되갚아야 하지 않겠느냐?”(5,24-29)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의 성전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여겨왔습니다. 그에 반해 예레미야는 그러한 이스라엘인들의 고정관념은 또 다른 우상일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구원의 보증이 될 수도 없으며 구원의 담보가 되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그분 뜻에 따라 살지 않고 그분을 외면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들이 절대적 보증이라고 믿고 의지하던 성전도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고 예레미야는 경고합니다. 성전이 파괴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재난 선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입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0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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