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마른 뼈의 부활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부 · 권력 · 명성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뜻으로,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성을 가리킴.)를 실천한 이를 꼽으라면 에제키엘을 빼놓을 수 없다. 에제키엘은 사제 부즈의 아들로 태어나(에제 1,3 참조)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스물다섯 되던 해인 기원전 598/7년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자로 살았으니, 활동한 장소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였다. 임금과 귀족들만 끌려간 시대에 이들과 함께 유배당했으므로, 명문세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로부터 11년 뒤 기원전 587/6년에는 이스라엘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완전히 나라를 잃고, 가난한 이들 일부를 제외한 백성 대다수가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2열왕 25,11-12 참조). 에제키엘은 자신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와 더불어,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몰락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비록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죄로 고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유배가 종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했지만(에제 1-34장 참조), 멸망이 실현된 다음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예고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회복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세워 주었다(33-48장 참조). 그가 전한 구원 신탁의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른 뼈의 부활’ 환시이다(37,1-14 참조). 백성이 죗값을 치르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겨 자비를 내리시겠다는 약속처럼(예레 42,12 참조) 유배지에서 스러져가는 이스라엘 집안이 새 생명을 얻으리라는 예고였다. 계곡에 쌓인 뼈 환시가 일어난 곳은 바빌론의 인적 드문 어느 계곡이었다. 주님의 영이 에제키엘을 데리고 나가신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뼈가 가득 쌓여있는 걸 발견한다. 죄다 바싹 말라있어,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 뼈 더미는 나라의 멸망으로 희망이 말라붙은 유배자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느낀 절망감은 에제 37,11(“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에 잘 드러난다.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는 잠언 17,22처럼, 백성은 스스로 무덤에 갇힌 죽은 사람처럼 느꼈다. 이스라엘 집안의 뼈가 계곡에 방치된 것은 그들이 주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백성은 계약을 체결할 당시,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겠노라고 서약했다(느헤 10,30 참조 : “그들은 하느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걷고, 주 우리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그분의 법규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실천하며, 어기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계약을 깨뜨렸으니, ‘계약 파기에 대한 저주’(레위 26,14-39; 신명 28,15-69 참조)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신명 28,26은 배신한 이스라엘이 적의 침공을 받아 쓰러지고, 그들의 주검은 새와 들짐승들에게 던져져 쫓아줄 이 하나 없으리라고 경고했다. 계약 파기에 대한 이러한 저주는 고대 근동에서 통용되던 것이라,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임금 에사르 하똔은 봉신 국가들에게 계약을 파기하면 그들의 시체가 평원을 채우고 맹금이 그 살을 먹게 되리라고 위협했다. 보복을 당해 죽는 것도 두렵지만, 명예롭게 묻히지 못하여 영혼이 지하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큰 위협이었다. 더구나 이스라엘 유배자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까닭은 계약을 파기하여 고향에서 쫓겨날 경우, 원수들 땅에서도 그 죄악 때문에 스러져가리라는 레위 26,39의 경고에서 비롯된 듯하다(“너희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스러져갈 것이다”). 죄악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곤경’ 또는 ‘재앙’이라는 뜻도 담고 있으므로, 죄악뿐 아니라 그 죄악의 결과로 닥치는 곤경까지 함축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주셨지만,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자연에 규칙이 있듯,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신 조물주를 섬길 때도 규칙이 있다. 조물주를 저버리는 행위는 그분의 본질인 생명과 자비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생명의 원천을 거부하여 곤경에 빠진 셈이라, 재앙은 자업자득이었던 것이다. 백성이 유배지에서 뒤늦게 깨닫고 절망하자, 에제키엘은 ‘회개의 전망’(레위 26,40-45)을 근거로 삼아 진심으로 뉘우치면 살아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에제키엘은 환시 가운데 뼈들 사이로 다니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뼈가 얼마나 메말랐는지 확인한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셨을 때, 그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였을 듯하다(에제 37,2-3 참조). 엘리야나 엘리사가 죽은 이를 소생시킨 사건도 최근의 죽은 이를 살려낸 것이었지(1열왕 17,17-24; 2열왕 4,18-37 참조), 오래된 뼈들을 되살린 것은 아니었다. 다니 12,2에서 땅 밑에 묻힌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지만(“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에제키엘이 그 구절을 알고 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니엘서 12장은 시대적으로 훨씬 뒤에 쓰였을뿐더러, 만일 에제키엘이 알았다면 하느님께 다른 어떤 대답을 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부활 사상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신약시대에도 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마태 22,23 등 참조). 에제키엘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주님께서 아신다고만 말한다. 자신은 몰라도 창조주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기에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부활 하느님의 다음 말씀은 뼈들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이었다(에제 37,4 참조). 에제키엘이 예언하자, 놀랍게도 뼈들이 진동하면서 연결되어야 할 상대 뼈를 찾아 붙기 시작했다(7절 참조). 그다음에는 힘줄과 살, 살갗으로 덮였다. 숨만 없는 상태였다. 그때 하느님께서 사방에서 ‘숨’(루아흐)을 모아들이시고 이들 위로 불게 하시자, 모두 제 발로 일어나 큰 군대처럼 되었다. 숨이 주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현상은 ‘바람’(루아흐)을 인격체로 표현한 시편 104,4을 떠올리게 한다(“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으시고”). 마른 뼈들에게 살을 먼저 붙여주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것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빚으시고 생명을 넣어주신 창세 2,7과 순서가 같다(“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숨을 ‘불어넣는다’(에제 37,5)는 동사도 하느님께서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신’ 창세 2,7과 동일하다. 그리스어 성경인 칠십인역은 이 동사를 ‘엠푸쎄쏜’으로 옮겼는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신(에네푸쎄쎈)’ 뒤 세상으로 파견하신 요한 20,22을 연상하게 한다. 마른 뼈 환시는 이스라엘 집안의 부활을 새로운 인간의 창조처럼 묘사했다. 이는 백성이 본성을 바꾸어야만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악인들이 죽기를 바라서 환난을 일으키신 게 아니었다(에제 18,23 참조 :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시련 속에 성숙해지듯, 이스라엘이 역경을 겪고 나서 깨달음을 얻도록 이끄시려고 재앙으로 치신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이스라엘 땅의 부활 마른 뼈 환시는 이스라엘 집안의 부활을 예고하여 백성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에제키엘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성전의 생명수 환시도 전하여, 이스라엘 땅이 회복되리라는 메시지를 선포했다(47,1-12 참조). 이 환시는 에제키엘이 주님의 영에 이끌려 하느님의 도성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정결하게 다시 봉헌된 성전을 발견하고,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 물이 점점 불어서 강처럼 되어 지나는 곳마다 기름지게 변화시키니, 이스라엘 땅을 소생시켜 줄 생명수였던 것이다. 이 강이 사해(死海)까지 닿으면,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바다가 치유되어 온갖 물고기로 가득 차게 된다. 사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3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사해 고도는 해저 400미터로서 세상에서 가장 낮으므로, 해발 700-750미터인 예루살렘과 1킬로미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성전의 생명수가 강이 되어 흐른다는 환시의 보도처럼, 실제로도 예루살렘에 비가 많이 내리면 고도가 낮은 사해 근처 광야로 몰려 홍수를 일으킨다. 그러면 그 물이 사해까지 흘러간다. 성전에서 솟아난 적은 양의 물이 점점 불어 강이 되는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신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2)를 떠올리게 한다. 겨자씨는 크기가 작아도 개체를 무수하게 퍼뜨려, 온 들판을 자기 꽃으로 채운다. 성전의 생명수 환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적절한 메시지였다. 그들이 나라를 잃고 죽음의 바다에 빠진 듯 상심하였기 때문이다. 곧 사해는 무덤 같은 유배지를 상징해 주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백성을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재건된 성전으로 돌아오시면, 그곳에서 생명수가 솟아나 사해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땅을 풍요롭게 가꾸어줄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 땅이 새 생명을 얻으면, 열두 지파가 땅을 공평하게 분배받게 된다(에제 48,1-29 참조).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도 그때부터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야훼 삼마’(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로 바뀌어(48,35), 주님의 현존을 영원히 상징해 줄 것이다. 에제키엘이 전한 마른 뼈 환시는 성전의 생명수 환시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낙담한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과 자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마른 뼈 환시대로 이스라엘은 기원전 538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성전의 생명수 환시는 새 성전이 되신 예수님의 활동으로 완전히 실현된다(요한 2,20-22 참조). 영원한 생명의 물은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다(요한 4,14 참조). 묵시 22,1-2도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가 관통하여 흐르는 새 예루살렘을 계시해 주었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글 · 사진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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