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7)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구원에 믿음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아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마태오 복음 20장에는 마태오만이 전하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앞선 베드로 사도의 질문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태오 복음 20장의 비유는 이 마지막 말씀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늘나라는 … 같다”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비교의 대상은 아침에 일꾼들을 찾아 나선 밭의 주인입니다. 비유는 아침 일찍 일꾼들을 찾아 나선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을 임금으로 합의합니다. 이 포도밭은 일이 많아서인지 주인은 아홉 시쯤 다시 일꾼들을 구하러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이 비유는 마치 자연스러운 일상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일꾼이 필요한 포도밭 주인이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갸우뚱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주인은 열두 시와 심지어 오후 세 시쯤에도 일꾼들을 불러옵니다. 이미 하루의 반이 지난 때에 일꾼들을 찾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이 주인은 오후 다섯 시쯤에도 일꾼들을 찾으러 나갑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이것이 일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일이 끝나고 주인은 가장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치릅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온 이들은 당시에 하루 임금으로 생각되는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주인의 행동은, 곧 비유의 흐름은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이 당연히 더 많은 품삯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비유에서도 먼저 온 이들은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라며 투덜거립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들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셈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 이 비유는 먼저 온 이들과 나중에 온 이들이 동일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주인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먼저 온 이들에게 준 한 데나리온은 그들에게 주어진 노동의 대가이고 나중에 온 이들에게 치른 한 데나리온은 장터에 서서 하루를 걱정했던 정신적 고통의 대가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포도밭 주인의 자비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는 차이가 있는, 누가 먼저이고 나중인지 시간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모두에게 동일한 혜택을 주는 주인의 모습은 그의 자비로움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품삯으로 설명되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은 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는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이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었던 이들도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먼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더 많은 은총을 받고, 나중에 믿게 된 이들이 당연히 더 적은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와 나중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선후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믿음을 가졌던 유다인 출신의 신앙인들과 나중에 복음을 접한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에 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태오는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에서 초점은 ‘나중에 온 이들’에게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나중에 온 이들에게도 같은 대접을, 같은 품삯을, 같은 구원을 선사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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