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다윗과 압살롬 (1) 왕이 된 다윗에겐 시련이 많았다. 가장 혹독했던 건 압살롬의 반란이다. 다윗이 총애했던 셋째 아들의 모반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 나탄은 왕자의 난을 예언한 적이 있다. 다윗이 밧 세바에 빠져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했을 때다. 이제 네 집안에선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2사무 12,10). 그의 예언대로 왕자들의 암투는 현실로 나타났다. 압살롬 반란의 발단은 맏아들 암논의 욕정이었다. 그는 배다른 여동생 타마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간계를 꾸며 겁탈하곤 얼버무리러 했다. 타마르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다윗 역시 화를 냈지만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타마르의 친오빠 압살롬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며 2년을 기다린 뒤 암논을 죽인 것이다. 에프라임 인근으로 왕자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살해했다(2사무 13,29). 왕위 계승자의 죽음이었다. 다윗은 진노했고 압살롬은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고향 그수르(Geshur) 왕국으로 가서 3년을 숨어 지냈다. 이후 다윗의 용서로 돌아오게 되지만 결국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살해되었다. 압살롬은 히브리말로 아브샬롬이다. 직역하면 평화의 아버지다.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수르 공주 마아카(Maacah)다(2사무 3,3). 그수르 왕국은 갈릴래아 북쪽으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다윗은 정략혼인으로 이들과 끌어들인 것이다. 이후 태어난 아들이 압살롬이다. 평화를 지켜줄 아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외모와 언변이 출중했기에 다윗은 끔찍이도 아꼈다. 아무튼,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불러들였다. 그수르 왕국과의 관계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타국이지만 어머니의 나라에서 압살롬은 삼년을 지냈다. 북쪽지파 명사들과 자주 만났을 것이다. 국경만 넘으면 이스라엘 땅이기 때문이다. 귀국 4년 뒤 마침내 압살롬은 고향이며 지지기반이었던 헤브론에서 반기를 든다. 쿠데타였다(2사무 15,10). 북쪽지파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자 세력은 강해졌다. 다윗은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떠난다. 왕궁에 들어온 압살롬은 작심하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했다(2사무 16,22). 왕위 찬탈을 공적으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되돌아갈 다리를 불살라버린 것이다. 다윗의 후궁들은 반란이 평정된 뒤에는 평생을 갇혀 지내야 했다(2사무 20,3). 쿠데타가 남긴 또 다른 상처였다. [2016년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압살롬 (2) 압살롬 반란에 다윗도 전투참가를 원했지만 군사들은 말린다. 다윗은 과격하게 대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2사무 18,5). 그렇지만 다윗진영은 기선을 잡고 반란군을 친다. 전사자가 이만 명에 다다르자 압살롬은 후퇴하다 붙잡힌다. 병사들은 임금의 명을 기억하고 죽이진 않았다. 하지만 요압은 그를 살해하고 시신은 숲속에 묻고 돌로 덮었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붙잡힌 것으로 되어 있다(2사무 18,9). 정말 그랬을까? 당시 노새는 고급 승용차로 왕실의 탈것이었다. 그런 노새가 압살롬을 나무에 달아놓고 가버린 것이다. 왕위가 거부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압살롬이 나무에 달린 것도 상징이다. 나무에 달린다는 건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기 때문이다(신명 21,23). 모두 후대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승전소식과 함께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통곡한다(2사무 19,1). 왜 울었을까? 밧 세바에 빠져 우리야를 죽였을 때 다윗은 보속을 받았다. 밧 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은 것이다(2사무 12,18). 다윗은 압살롬 죽음도 그 연장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다 살해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죽어야 했다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요압이 끼어든다. 반역한 아들인데 왜 이토록 슬퍼하는 겁니까? 왕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다윗은 마음을 추스른다. 반란은 다윗이 통일왕국 왕이 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알릴 때 일어났다. 통합을 반대하던 이스라엘이 합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민족의 일치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살롬을 지지했던 이스라엘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인다. 다윗도 화답하며 압살롬 군사령관이었던(2사무 17,25)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받아들인다. 어정쩡하게 남아있던 병사들을 흡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벤야민 지파 세바(Sheba)가 또 난을 일으킨다.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외쳤다. 다윗에게서 무얼 바라겠는가? 이스라엘아 돌아가자(2사무 20,1). 다윗은 강경 진압으로 나갔다. 압살롬 난에서 초기대응을 제대로 못한 것이 반영된 것이다. 반란군은 이스라엘 최북단까지 밀려갔고 아벨 벳 마아카(1열왕 15,20)에서 세바는 살해된다. 이후 반란은 없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자 북쪽은 기어이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갔다. [2016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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