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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종말론자 바오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20 조회수5,397 추천수1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종말론자’ 바오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바오로 영성에 나타난 주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성찰하고 싶은 주제는 ‘종말론자 바오로’입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은 바오로의 삶 전체에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서간과 묵시문학 사상

 

종말은 마지막 때(에스카톤)를 가리키는데 이 말에서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말이 유래합니다. 바오로의 종말에 대한 사고는 유다이즘의 묵시문학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이 지키는 율법의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새롭게 받아들인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유다이즘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그리스도교적 형태 안에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5-6세기 구약의 후기 예언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세력 사이에 무서운 우주 전쟁이 벌어진다는 믿음,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책임지고 계시며 그 마지막을 결정하신다는 믿음,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한테는 보상을 해주시고 불의한 사람한테는 벌을 내리시리라는 사고, 현재의 세상은 쇠락해 가고 있으므로 시험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충실한 것, 고통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종말에 하느님께서 정당하게 보상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것 등입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예수님과 바오로 시대에 다양한 유다인의 사고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요한 세례자의 설교와 사해 문헌에서 구체적으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관점은 그의 윤리 가르침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루시아

 

바오로는 그가 처음으로 쓴 편지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이 교회 신자들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1,9-10).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이방 신들 대신에 하느님을 섬기고 ‘파루시아’, 곧 심판 때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4,13-5,11에서 바오로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파루시아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4,16-17).

 

바오로는 파루시아가 도래할 것임을 명시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테살로니카인들 가운데 파루시아와 관련해서 근심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전반적으로 사후의 삶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17,32에서 바오로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바오로를 비웃었지요.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새롭게 얻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의 임박한 도래를 기대했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 가운데에서 이미 죽은 이들은 주님의 재림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이미 죽은 사람들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1테살 4,13-18 참조). 둘째, 주님께서 도래하실 시간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5,2). 그러므로 테살로니카인들은 늘 준비하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5,1-11 참조).

 

바오로는 재림에 대한 자신의 말이 ‘주님의 말씀’(4,15 참조)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는데, 5,1-5에서 복음서의 묵시문학적 가르침 속에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3장; 마태 24-25장 참조).

 

유다이즘의 묵시문학과 바오로의 묵시문학의 중요한 차이점은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가장 먼저 부활하시어 지금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장차 재림하시어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죽을 때에 그들의 영혼이 몸을 떠나면 부활을 기다리는 장소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부활이 있을 것이고, 이때까지 기다려온 영혼들은 심판과 영원한 나라의 시작을 위해 그들의 몸과 결합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1테살 4,16-17에서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남아있게 될 우리’라고 표현함으로써 바오로는 명백하게 자신을 포함합니다. 이는 바오로가 자신의 생애 동안에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처럼 바오로도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영원히 지속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부활한 이들은 심판 때에 주님 곁에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오로가 1코린에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6,2-3 참조). 즈카 14,5의 예언에 대한 암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주 나의 하느님께서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실 것이다.”

 

 

부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5장에서도 바오로의 종말에 대한 사고를 볼 수 있는데 특히 부활과 연결됩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종말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에 대해 근심했다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는 부활을 부정한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12절 참조).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데도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먼저 예수님 부활의 기본적인 선포를 상기시킵니다(1-11절).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이 미래의 부활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론적 전망입니다. 우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건설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바오로는 이 기초에서 출발하여 광범위하고 복합적으로 부활에 대해 설명합니다(12-56절). 여기에서 바오로는 부활을 묵시론적 종말론과 연결합니다(20-28절). 부활에는 차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시고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이 부활하게 됩니다(23절). 이것은 바오로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첫 단계로 여겼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51-52절에서 바오로는 부활할 때의 몸의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두 그룹이 있습니다. 먼저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고 이어서 ‘우리’, 곧 바오로와 다른 사람들이 죽음 없이 부활 상태로 변화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여기에서 부활한 몸의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는 이미 앞에서 ‘살과 피는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50절 참조)라고 말했는데 이제 부활 때에 영혼과 몸의 결합은 썩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이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습니다(53절). 그러므로 죽은 이들의 영혼은 변화된 몸과 다시 결합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살아있던 사람들은 영혼과 몸이 갈라지지 않고 변화됩니다.

 

 

심판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노선 안에서, 바오로는 심판을 파루시아와 부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최후 심판’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연결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10). 심판의 날은 유다이즘 안에 생겨난 묵시문학적 세계관의 일부였습니다.

 

유다인의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 바오로도 심판 날이 오면 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결과를 맞으며, 의로운 사람들은 보답을 받아 구원될 것이라고 말합니다(로마 2,7-8 참조). 하느님과 예수님 모두 ‘심판대’에 앉아 자신의 행위를 결산하려고 불려나올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이 현세에서 사랑과 의로움의 삶을 이어온 사람한테는 심판 날에 구원이 기다리지만, 악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파멸을 맞을 것입니다.

 

아무도 심판대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 심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심판에 대한 말은 우리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시야에서 놓치지 말라는 것, 생애 마지막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기

억하라’는 권고로 들립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이 현세에서 이미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우리의 최후 운명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이며 그 충만함이 언젠가 드러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종말

 

제가 ‘종말론자 바오로’에 대한 글로 올해 바오로 영성의 주제를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바오로가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을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파루시아, 부활, 심판이라는 용어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 우리의 종말과 관련됩니다. 종말에 대한 바오로의 사고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온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느님 안에서 현재를 더욱 풍요롭게 살라고 초대하며, 미래를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게 합니다.

 

한 해를 마치면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면서 삶에서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남아있는 것, 정리해야 할 것과 시작해야 하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 현재 종말을 사는 자세를 청해봅니다. 아멘!

 

* 한 해 동안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을 집필해 주신 임숙희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대표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 부설 혼인과 가정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2월호, 글 임숙희 · 그림 서소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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