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9)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 11,9)
구세주 오심을 기뻐하는 군중 공관 복음서에서 구원을 향한 예수님의 짧지 않은 여정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제 마지막 장소에 다다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차이가 있지만, 공관 복음뿐 아니라 요한 복음 역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요한은 이미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수님이지만, 사람들이 라자로를 되살린 표징에 대해 듣고 예수님을 환호하기 위해 맞으러 나왔다고 이야기하면서 바리사이들의 반응을 전해 줍니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 가고 있소”(요한 12,19). 또한, 제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전합니다. 물론 루카 복음은 이 이야기와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예리코에서 벌어진 세관장 자캐오와의 만남과 미나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예리코에서의 치유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이전의 마지막 기적이면서 예수님의 여정이 당시 사람들의 동선과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를 피해 요르단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사마리아 지역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이때에 처음 만나게 되는 도시가 바로 예리코입니다. 이곳에서 베타니아와 벳파게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례의 길이었고 예수님 역시 그 길을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는 두 명의 소경을, 그리고 마르코와 루카는 한 명의 소경을 치유해 주신 것으로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은 동일합니다. 길을 지나는 일행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듣고 바르티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며 소리칩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칩니다. 그의 외침은 단순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자비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청원만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그의 청원은 시편 6장 3절을 기억하게 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는 쇠약한 몸입니다. 저를 고쳐주소서. 주님, 제 뼈들이 떨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외침은 시편의 기도처럼 이루어집니다. 또 소경의 외침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정녕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결국, 소경의 외침은 자신을 위한 것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향해 가시는 예루살렘 전체를 위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청원이기도 합니다. 군중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런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지금도 미사에서 성찬례 시작에 외치는 이 표현은 호산나, 저를 구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고 전합니다. 어린 나귀는 즈카르야의 예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마침 임금처럼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 그분은 바로 즈카르야의 예언을 이루듯 큰 말이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군중들은 마치 임금을 대하듯 예수님을 맞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임금의 모습과 달랐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묘사합니다. 그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임금이셨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임금이었습니다. 임금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그것과는 다른 임금이란 호칭을 받으며 이 세상의 삶을 끝내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경이 보여 주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25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