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7)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배반의 입맞춤, 고통의 시작 알리다 - 조토 디 본도네(1266~1337) 작 ‘유다의 키스’,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가톨릭굿뉴스 제공.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의 배반으로 잡혀갑니다. 네 복음서는 모두 최후의 만찬 중에 이러한 내용을 예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라고 표현하고 루카는 그들과 함께 ‘성전 경비대장들’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좀 더 나아가 요한은 이들과 함께 ‘군대’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다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 서로 신호를 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입맞춤’입니다. 당시에 입맞춤은 평화와 안녕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인사였습니다. 어원적으로는 형제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역설적으로 제자가 스승에게 건네는,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었지만 유다에게 이 행동은 ‘배반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포위되고 예수님의 일행 중 한 명은 칼을 들어 저항합니다. 유독 요한복음은 이 제자가 ‘베드로 사도’였다고 밝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다만 루카복음 22장 35-38절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이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행동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셨다는 이야기의 뒷부분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마태 26,56)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는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1-52)는 사실 또한 전합니다. 이 젊은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지만 마르코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렸음을 강조합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복음서는 마치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장면을 통해 제자들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보내진 무리와 군사들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로 기억되는 유다 이스카리옷. 그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전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자 유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찾아갑니다. 아마도 유다는 자신이 돈을 받고 스승을 넘겨주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받은 은전 서른 닢을 성전에 던지고는 목을 매달아 죽습니다.(마태 27,1-5) 마태오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즈카리야서 11장 12-13절의 예언을 통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했음을, 하느님의 구원을 향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이와 함께 루카복음의 2부로 볼 수 있는 사도행전 역시 마티아 사도의 선출과 함께 유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는 자신이 받은 돈으로 밭을 샀지만, 그곳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마태오와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된 ‘피밭’이라 불리는 땅이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사도 1,17-19)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서부터 항상 함께했던 제자들,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간에 제자들은 함께하지 못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때부터 제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제자의 배반과 달아난 제자들. 복음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 겪었던 고통의 시간 안에 가장 가까운 제자들로부터 버림받는 체험 또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26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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