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1)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를 방황한다. 영적 구심점은 계약 궤였다. 야훼께서 말씀하는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 판이 있었다(1열왕 8,9). 만나를 담은 그릇과 아론의 지팡이도 있었다고 한다(히브 9,3). 성막은 계약 궤를 모신 천막이었을 뿐이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계약궤를 실로(Shiloh)에 모셨고(여호 18,1) 판관 시대에도 그곳에 있었다(판관 18,31). 자연스레 실로는 신앙과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왕이 된 다윗은 계약 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치적 통합은 이뤘지만 실질적 통합은 이제 시작이란 것도 알았다. 지파 간 갈등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계약 궤를 항구히 모실 장소를 구상한다. 그곳에 성전을 지어 민족의 일치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예루살렘이 최고의 장소로 떠올랐다. 다윗은 즉시 움직인다. 7년 간 거주했던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옮긴 것이다. 수도의 이동이었다. 반발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다윗은 기일을 택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셨다. 사무엘기 하권 6장은 계약 궤를 옮기는 기록이다. 군사 삼만 명이 동원된다. 이렇듯 많은 인원이 소용되는 건 아니다. 일종의 전시효과(퍼포먼스)였다. 아직도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사울에 대한 미련 역시 여전히 팽배해 있었다. 예루살렘 여부스족 귀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계약 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다윗은 뛰며 춤추었다고 전한다. 그 장면을 미칼이 비웃었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2사무 6,16). 미칼은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이다. 다윗은 말한다. ‘주님께서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셨소.’ 사울 왕조에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은 미련을 접으라는 암시다. 원래 예루살렘 땅엔 가나안 원주민(창세 10,15) 여부스(Jebus)족이 살고 있었다. 난공불락 천연 요새였기에 여호수아도 점령 못 한 곳이었다(여호 15,63). 다윗은 지하수로를 통해 잠입에 성공했다(2사무 5,8). 산 위의 도시였기에 식수 공급을 위한 갱도가 있었던 것이다. 점령 후 다윗 성이라 불렀고 예루살렘으로 개명되었다. 다윗 시대엔 2,000명 정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밧 세바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성전 건립은 솔로몬이 완성한다. 워낙 많은 재정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다윗은 준비하는 운명이었고 결실은 그의 아들 솔로몬 몫이었던 셈이다. [2017년 2월 26일 연중 제8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2) 다윗은 예루살렘 동쪽에 계약 궤를 모신다. 모리야(Moriah) 언덕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창세 22,2). 원래 이 지역엔 여부스족이 살았고 그들 말로 시온(Zion)이라 했다. 요새란 뜻이다. 다윗은 이곳을 점령한 뒤 성벽을 보완하고 살았던 것이다. 다윗성이다. 훗날 예루살렘 성전도 이곳에 선다. 시온 산자락 모리야 언덕이다. 이렇게 해서 시온은 성전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이사 18,7). 이후 예루살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 되었고 시오니즘의 어원이 되었다.
성전을 완성시킨 이는 솔로몬이다. 즉위 4년에 시작해 11년에 완공했다(1열왕 6,37). 18만의 인부가 동원된(1열왕 5,27-30) 7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솔로몬은 기원전 971년 즉위했기에 완공은 BC 959년이다. 역사에선 제1성전이라 부른다. 직사각형으로 동쪽을 향해 있었다. 건물은 크지 않았지만 뜰은 넓었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한 것이다. 방은 두 개였는데 서쪽 방에 계약 궤를 모셨고 지성소(至聖所)라 했다(히브 9,3). 야훼께서 임하시는 장소로 알았기에 일 년에 한 번 대사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 옆방은 성소(聖所, Santuary)라 했고 사제들의 공간이었다. 성전 외벽은 흰 대리석이었고 내벽은 나무로 장식했다. 이후 성전은 자연스레 왕권과 연결되었고 예루살렘은 12지파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흥도시로 성장했다.
16대 임금 요시아는 예루살렘을 유일한 제사장소로 지정한다. 그러면서 다른 곳의 제사는 금지시켰다. 강력한 예루살렘 중심주의였다. 하지만 그가 죽자(BC 609년) 예루살렘은 수모를 겪는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침공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04년과 597년 두 차례 걸쳐 도시는 약탈당했다. 586년엔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지도자들은 포로가 되었고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제1성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기원전 582년엔 더 많은 유다인이 끌려갔다. 바빌론 포로생활의 시작이다.
훗날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린 페르시아는 유다인을 고국으로 보냈고 성전재건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예전 자리에 소박한 형태로 복원된다. 즈루빠벨의 제2성전이다. 하지만 도면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토록 중시하던 계약 궤도 사라지고 없었다. 약탈당해 잃어버린 것이다. 로마시대 이스라엘 왕이었던 헤로데는 제2성전을 화려하게 증축 보강한다. 작업은 46년간 계속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다. [2017년 3월 5일 사순 제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3)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는 바빌론을 정복한다. 이로써 바빌로니아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키루스는 관용정책을 펼치며 포로들을 해방했다. 유다인의 예루살렘 귀향도 허락하고 성전 건립도 수락했다(에즈 6,3). 이듬해(BC 538) 이스라엘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주축은 바빌론에서 태어난 유배 2세들이었다. 46년 유배를 거치면서 1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인도자는 즈루빠벨(Zerubbabel)이었다. 유다 지파로 바빌론에서 태어났고(1역대 3,19) 페르시아가 임명한 유대 총독이었다.
즈루빠벨은 바빌론 출신이란 뜻이다. 본래 이름은 세스바차르였다(에즈 1,8). 키루스의 명으로 포로들 귀환을 책임졌던 것이다. 5만에 가까운 사람이 돌아왔다고 한다(에즈 2,64). 대사제 예수아는 약탈당한 성전 기물의 일부를 되찾아 왔다. 즈루빠벨은 예수아와 함께 임시 제단을 쌓고 건축을 시작했다(에즈 3,8). 하지만 시련에 부딪힌다. 사마리아 유다인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처음엔 그들도 동참을 원했다. 그런데 원로들이 막았다. 이교도와 섞여 살았기에 불경스럽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화가 난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건축을 반역행위로 몰아 페르시아에 고발했다(에즈 4.12). 건축을 잠시 중지하라는 왕실의 연락이 왔다.
관리였던 즈루빠벨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건축은 16년간 중단된다(에즈 4,24). 이 무렵 등장하는 예언자가 하까이다. 민중을 독려하며 역경 속에서 일치를 외쳤다. 그리하여 다리우스 2년 공사는 재개되었고 임금은 국고지원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조공의 일부가 건축비로 들어왔다(에즈 6,8). 마침내 기원전 516년 성전은 완공되고 515년 3월 봉헌식을 가졌다. 키루스 황제 때 시작하고 다리우스 임금 때 완성한 것이다(에즈 6,13). 역사에서 말하는 즈루빠벨의 제2성전이다. 오늘날 설계도는 전해지지 않고 기록만 남아 있다.
당시는 성전 제구들을 모두 약탈당한 뒤였다. 계약 궤도 사라지고 없었다. 새롭게 만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윗은 민족일치를 위해 성전을 구상했고 성전의 중심은 계약 궤를 모신 지성소였다. 그런데 계약 궤를 잃어버린 것이다. 자연스레 종교의식과 율법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즈루빠벨은 예수님 족보에도 등장한다(마태 1,12). 뒤를 잇는 총독이 느헤미야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고 에즈라와 함께 율법정신을 쇄신시켜 나갔다. [2017년 3월 12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4) 예루살렘 제2성전은 헤로데 때 화려하게 증축된다. 뛰어난 정치력으로 37세에 유대 왕이 되었고 40년간 통치한 인물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니었다. 출생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마카베오 가문의 미르얌 공주와 재혼했고 성채와 공공건물을 많이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도 손댔다. 작업은 기원전 20년에 시작해 46년간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제1성전을 능가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탄생시켰다. 헤로데는 성전 터를 2배로 넓혔고 성벽도 이중으로 쌓았다. 광장에서의 집회도 허락했고 이방인 출입과 장사도 허용했다. 그러면서 광장 안쪽에 담을 쌓아 유대인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잡인의 접근을 막아준 것이다. 성전은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고 유대인 최고 법정 산헤드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66년부터 시작된 유대 독립전쟁은 헤로데가 심혈을 기울였던 성전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70년 티투스가 이끌던 로마 군대는 성전에서 결사 항전하던 유대 독립군을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성전은 ‘돌 위에 돌이 얹혀있지 못할 만큼’ 심하게 파괴되었다. 남은 것이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성벽 일부다.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너진 성전에 유피테르 신전을 지으려 했다. 유대인은 강하게 반발했다. 2차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4년 만에 진압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파괴되었다. 황제는 유대교를 법으로 금했다.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면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이후 유대인의 해외 떠돌이가 본격화되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 산위의 도시다. 북쪽만 교통수단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계곡에 싸여 있다. 동쪽계곡이 키드론 골짜기고 남쪽과 서쪽은 힌놈계곡이다. 성벽과 성문은 북쪽 길에 있었다. 현재는 신(新)시가지가 성벽까지 닿아있다. 성안에는 구(舊)시가지가 예전부터 있었고 요르단에 속했다. 신시가지만 이스라엘 땅이었다. 따라서 성 밖 신시가지 주민은 성탄과 부활절 외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67년 중동전쟁(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곤 자국 영토로 선언해버렸다. 이후 양쪽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다. 예루살렘은 성경의 무대다. 그런 이유로 순례와 관광이 늘 이루어지고 있다. 유대인에겐 여전히 정신적 고향이다. 무슬림에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기에 메카와 동등한 성지로 인식하고 있다. [2017년 3월 19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