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체 내용을 구분하라면? 크게 예루살렘 멸망 이전 이야기(1-24장)와 멸망 이후 이야기(33-48장)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이민족들에 대한 예언(25-32장)이 들어있습니다. 보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제키엘이 받은 환시와 소명(1-3장), 예루살렘 멸망 예언(4-24장), 이민족들에 관한 예언(25-32), 구원 예언(33-39장), 새 예루살렘 예언(40-48장). 에제키엘 예언서를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듯이 사건 연대 순서에 따라서 가지런히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통독해 나가기가 난해합니다. 여느 예언서들과 같이 에제키엘서도 예언자 에제키엘 자신이 또는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신학적 견지에서 정리해놓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서 첫머리에 무슨 내용이? 흔히 사람들은 에제키엘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얼떨떨하게 느끼기 일쑤입니다. “……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보았다.”(1,1ㄴ) 이어서 환상적인 내용이 줄지어 펼쳐집니다.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1,4) 이러한 환시는 훗날 유다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유다교 랍비들은 에제키엘 예언서 첫머리를 아예 공적으로 봉독하지 못하게까지 합니다(1,4-28). 에제키엘은? 환시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두루마리를 받아먹어야 했습니다(2,8-3,3).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3,3) 에제키엘은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2,10ㄴ)있는 운명의 내용을 음식처럼 받아먹고 말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3,3ㄴ) 이는 예언자 자신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말씀과 하나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분 말씀이 그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곧 예언자의 몸 자체가 그분 말씀 선포를 위하여 존재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말씀을 받아 삼킨 에제키엘은? 거칠고 쓰디쓴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가 입에 ‘꿀처럼 달다’는 표현은 자신에게 낯설고 힘들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체험까지도, 큰 불행의 말씀까지도 자신에게 말씀을 내려주시는 영원하신 분께 끝까지 순종해가며 받아들일 때 예언자는 결국 내적 영적 달콤함을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에제키엘은? 앞선 집필 예언자들이 시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한 데 반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에제키엘은 거의 산문으로 집필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포위된 후 그곳 주민들이 겪을 운명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줍니다(5,1-4). “너 사람의 아들아,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가져다가, 그것을 이발사의 면도날처럼 사용하여 네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저울을 가져다가 그것을 나누어라.”(5,1) 옛 유다 사회에서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잘라져나가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참조: 2사무 10,4-5). 칼은 전쟁과 폭력의 상징입니다. 이 구절은 곧 예루살렘 주민 모두가 이렇게 큰 난을 겪게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 말씀을 입으로만 전하는 그분의 대변인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임무는 자신이 선포한 말씀이 성취되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 투신하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에제키엘은 자신의 실존, 그의 삶 전체가 예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12,6)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12,11)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24,24)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불행이? 여러 가지 상징적 행위를 보고 사람들은 묻게 됩니다. ‘도대체 왜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온 주민들이 살육당하든가 곤궁으로 죽어가거나 아니면 유배지로 끌려가야 하나? 예언자는 답을 줍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뽑으시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상 뭇 민족을 대표하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그분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선민으로서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다른 뭇 민족들보다 더 주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하느님 뜻과 선의 표본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즐겨 따르는 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민 스스로가 그분께서도 어쩔 수 없이 선민을 저버리실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의 역사관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머지않아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인류구원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반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선민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나에게 낳아준 아들딸들을 데려다가, 그것들에게 양식으로 바쳤다. 너의 그 탕녀 짓만으로는 모자랐단 말이냐? 너는 내 아들들을 잡아 바쳤다. 불 속을 지나게 하여 내 아들들을 그것들에게 바쳤다…… ”(16,20-22; 23장) 이스라엘 역사는 반역의 역사? 이와 같이 자기 민족 역사를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경우는 어쩌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듯합니다. 그러나 에제키엘의 역사적 통찰은 그 출발점부터 온통 부정적 시각에 집착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당신 백성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주시는데 하느님을 거역하여 선민이 줄기차게 배신을 되풀이해왔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려고 이제 그분께서 분기점(turning point)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환기를 맞이하려면 과거를 청산하는 심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12,2) 또는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는”(33,32ㄴ)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현금의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에 맞닿아있습니다. 악성 암 덩어리를 제거하거나 녹여버리지 않고서 새로운 세포로 생명력 넘치는 새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활? 에제키엘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부활을 예언합니다.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37,10) 이민족의 지배 아래 탄식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죽음 대신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시어 다시금 한 민족, 하나의 공동체로로 부활하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새 계약과 새 마음? 새 계약을 뿌리내리게 하려면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반역의 역사가 말해주듯 인간의 근본적 회개는 인간 힘만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그분께서 개입하십니다. 이제 그분께서 새 마음을 불어넣어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36,24-26ㄱ) 우리가 사용하는 성수(聖水)의 유래를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3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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