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9)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예수님의 죽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 마사초 작 ‘성 삼위일체’, 1426년쯤,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가톨릭굿뉴스 제공.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를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로마의 형벌이었던 십자가형은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에 처형된 이는 적게는 서너 시간 동안 그리고 길게는 하루가 넘도록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한때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인 연구, 곧 실제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어떠했는지 따져보았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식 상태로 죽어 가는 형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에 대한 언급은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이 조금 다릅니다. 요한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시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날은 파스카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요한 19,14) 반면에 마르코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마르 15,25) 이와 함께 공관 복음은 낮 열두 시가 되어 어둠이 온 땅을 덮었고 예수님은 오후 세 시쯤 숨을 거두셨다고 전합니다. 공관 복음이 전하는 시간에 대한 언급이 좀 더 적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모아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 이러한 전통은 하인리히 슈츠나 요셉 하이든과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곡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 다른,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은 마치 제자들과 신앙인들을 향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목마르다.”(요한 19,28)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 시각이 유다인들의 9시, 지금의 오후 3시쯤이라고 전합니다. 다음날은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을 무덤에 모십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마태 27,57) 의회 의원으로(마르 15,43)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고(루카 23,50)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그가 이미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말합니다.(요한 19,38) 이렇게 예수님의 드라마는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사람은 이것이 모든 사건의 끝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에도 그와 함께 있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또한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1) 요한복음에서 요한 사도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제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인들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 애통해 할 뿐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드러나게 예수님과 활동을 했기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복음서들은 제자들의 부재(不在)를 통해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12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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